형법에 '기분상해죄'라는 죄목은 없다. 하지만 한국 시장에는 엄연히 존재한다. 대한민국 유통 시장에서 이 죄는 웬만한 실정법 위반보다 더 무거운 정서적, 경제적 처벌을 받는다. 법을 어기면 벌금을 내면 그만이다. 소비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기업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대통령의 지적에도 꿈쩍 않는 쿠팡의 최근 행보를 보면 이 같은 불문율을 간과하는 듯해 안타깝다.

김범석 쿠팡 의장은 올해도 국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0년째다. 노동자의 죽음, 개인정보 유출, 정산 지연 등 굵직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그는 '미국인'이자 '미국 상장사'라는 방패 뒤에 숨었다. 만약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어땠을까. 총수가 직접 고개를 숙이고 쇄신안을 발표하며 국민 앞에 섰을 것이다.


사고는 어떤 기업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수습하는 태도다. 여기서 기업의 격(格)이 드러난다. 쿠팡의 대처 방식은 진심 어린 사과보다 '법리적 방어'가 우선이었다. 창업주의 사과는 없었고 CEO와 실무자는 책임을 떠안을 만한 표현을 피하기 급급했다.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보다 법리에 기반해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데 골몰하는 모습이었다.

한국 소비자는 독특하다. MZ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MBTI(성격유형검사)로 따지자면 'F'(감정형) 성향이 강한 편이다. 우리는 기업 오너의 도덕성에 열광하고 분노한다. 재벌가 자녀가 편법 없이 군대에 가거나 해외 유학이 아닌 국내 대학 진학을 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돈쭐(돈으로 혼쭐) 내주자"며 지갑을 연다. 결식아동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했다는 치킨 가게의 미담이 알려지자 "음식은 받지 않을 테니 돈만 받으라"며 주문이 폭주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제품과 서비스의 품질이나 가격과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다. 반대로 오너 일가의 갑질이나 비윤리적 행위가 드러나면 업계 1위 기업이라도 불매운동으로 응징한다. 이것이 한국 소비자의 정서다.

쿠팡은 사고 이후에도 철저히 'T'(이성형)의 논리로만 일관하고 있다. "우리가 제일 싸고 빠르지 않느냐"는 기능적 편익을 강조한다. 소비자들이 록인(Lock-in·자물쇠) 효과 때문에 절대 떠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는 듯하다. 오산이다.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소비자 같지만 기분이 상하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등을 돌리는 것 또한 소비자다.


이번 사태로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부과하게 될 과징금은 수천억원, 많아야 1조원대로 추정된다. 이는 쿠팡의 매출 규모를 생각했을 때 경영상 '비용'으로 털어낼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소비자의 마음이 떠나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고가 났을 때 우선 돼야 하는 건 제일 윗사람의 진심 어린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다. 가장 나중에 나와야 하는 것이 법리다. 나라가 들썩이는 초대형 사고에도 쿠팡의 리스크 관리 매뉴얼 최우선 순위는 법리였다. 진심을 전해야 할 창업주 김범석 의장은 일관된 '부재'로 자신의 '본심'을 전했다.

연매출 50조원을 바라보는 쿠팡이 지금 살펴야 할 것은 공정위의 제재가 아니라 부글부글 끓고 있는 민심이다. 김 의장은 '한국인은 시야가 좁고 스마트하지 못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한국 소비자는 괘씸한 기업을 심판하는 데 있어서 만큼은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집요하다. 김범석 의장이 나서야 하는 이유다.
황정원 산업2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