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통용되던 원/달러 환율 공식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수출도, 경상수지도 나쁘지 않은데 왜 원화만 약할까. 원/달러 환율이 고점권에 머무르며 시장의 의문이 커지고 있다. 통상 경기 둔화나 외국인 자금 이탈이 환율 상승을 설명해 왔지만 최근에는 환율이 좀처럼 꺾이지 않는 모습이다.
염승환 이베스트투자증권 이사는 최근 동행미디어 시대와의 인터뷰를 통해 "과거에 통용되던 환율 공식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공식이 어긋난 데는 외국인 자금보다 국내에서 해외로 향하는 달러 수요가 환율을 좌우하는 구조로 바뀐 점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염 이사는 "개인뿐 아니라 기업과 연기금까지 해외자산 투자를 확대하면서 국내에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달러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이 환율 하방을 막고 있다"고 덧붙였다.
"내년엔 내려갈 힘도 있다…WGBI·경상흑자, 하반기 1360원대"
염 이사는 최근 환율 흐름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달러의 이탈'을 꼽았다. 과거에는 한국에 위기가 오거나 외국인이 돈을 빼갈 때 원화 가치가 떨어지는 패턴이 뚜렷했다. 그러나 올해 하반기 국면은 다르다는 것이다.그는 "한국 경기 모멘텀이 미국보다 나쁘지 않고 외국인은 주식을 판다고 해도 채권은 많이 사고 경상수지 흑자도 크다"며 "이런 조건이면 환율이 내려가는 게 정상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한국 내부에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달러 수요다. 개인 투자자뿐 아니라 기업, 정부, 연기금까지 해외 자산 투자에 나서며 달러 수요가 기록적으로 커졌고 경상흑자·외국인 채권 매수로 들어오는 달러를 상쇄한다는 분석이다.
염 이사는 "달러 자산을 사는 규모가 외국인이 한국 자산을 사는 돈보다 더 크고 이는 위기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했다. 염 이사는 이 현상의 배경으로 확장재정과 유동성 공급을 함께 언급했다.
재정지출 확대가 체감되는 국면에서 '원화 가치 방어'보다 '달러 자산 분산'이 더 강해졌고 결과적으로 환율의 하방이 막혔다는 설명이다. 그는 "환율이 오르는데 주가가 오르는 것도 과거 공식으로는 이상하지만 돈이 풀리는 국면에서는 화폐 가치가 떨어지며 자산 가격이 오르는 흐름이 나타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염 이사는 이를 일본의 아베노믹스와 비교했다. 그는 "당시 일본도 대규모 유동성 공급으로 엔화 가치가 급락했지만 그 기간 일본 증시는 몇 배 상승했다"며 "최근 한국 시장도 정책 기조상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경기 부양을 최우선에 두는 '큰 정부' 기조에서는 환율이 일정 부분 희생될 수밖에 없다"며 "현재 환율 움직임은 그런 정책 선택의 결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염 이사는 내년 환율이 지금처럼 고점에 머물기만 하진 않을 것으로 봤다. 핵심 근거로는 ▲경상수지 흑자 확대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에 따른 자금 유입을 들었다. 그는 "내년 반도체 이익 전망이 좋아 수출로 들어오는 달러가 올해보다 늘 수 있다"며 "기본적으로 올해보다 달러 유입 여건이 개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여기에 한국의 WGBI 편입이 가세한다. 염 이사는 "내년 4월부터 11월까지 편입 과정에서 매월 9조원 정도의 채권자금이 들어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며 "개인 투자자들이 특정 월에 미국 주식을 역대급으로 산 규모와 맞먹는 수준의 수급이 방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해외주식 매수는 매월 같은 강도로 반복되기 어렵다는 점도 하방 요인으로 제시했다.
다만 환율 하락은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당장 환율이 급락하는 흐름은 아니고 내년 상반기보다는 하반기로 갈수록 환율이 더 의미 있게 내려오는 그림을 예상한다"며 "상반기에는 1300~1400원대를 오가며 1400원을 살짝 깨고 하반기에는 1360원 정도를 예상한다"고 진단했다.
"내년 시장의 색깔은 피지컬AI…반도체·현대차 '우선순위'"
고환율 국면 속에서도 증시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염승환 이사는 올해를 두고 "큰 변화가 시작된 해"라고 평가하며 내년은 그 변화가 본격적으로 '진화하는 구간'에 접어드는 시점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염 이사가 '내년 투자 지도'로 제시한 큰 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여전히 '반도체', 다른 하나는 '피지컬 AI'(로봇·자율주행 등 실물기반 AI)다.
그는 '확신 구간'이 아닌 영역에서 기회를 찾는 전략도 강조했다. 그는 "이미 좋은 게 다 반영된 걸 뒤늦게 쫓아가면 비싸진 구간일 수 있다"며 "시장에 반신반의가 남아 있을 때 내년에 좋아질 것을 찾아보는 게 투자에는 더 유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건설과 엔터도 주목했다. 건설은 유동성 확대 속에서 서울은 대출 규제로 거래가 막히고 수요가 지방으로 이동하며 미분양 해소·착공 재개로 연결될 가능성을 들었다.
엔터는 엑소, BTS 등 대형 그룹의 복귀가 본격화될 경우 콘서트 중심의 보복 수요가 폭발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못 봤던 만큼 수요가 몰리면 티켓 가격이 '부르는 게 값'이 될 수도 있다"며 "지금 주가가 확신 구간이 아니라 반신반의 구간인 점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염 이사는 마지막으로 투자 판단의 기준을 '지수'가 아닌 '이유'에 두라고 강조했다. 그는 "코스피가 얼마까지 갈지를 맞히는 것보다 왜 그런 흐름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논리가 더 중요하다"며 "그 논리에 동의한다면 목표가가 아니라 방향을 가져가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정리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어 "전망은 어디까지나 전망일 뿐 맹신은 가장 위험한 선택"이라고 덧붙였다.
투자자의 준비도 수익률을 가르는 변수로 꼽았다. 염 이사는 "같은 시장을 보더라도 정보량, 인풋에 따라 확률은 달라진다"며 "정보와 이해가 쌓이면 반반의 선택이 아니라 더 유리한 쪽을 고를 수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