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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1개월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 A씨(여)는 소아청소년과 진료받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 헤매는 일이 비일비재해서다. 현장 진료는 몇시간씩 기다려야 하고 병원 예약 애플리케이션(앱)을 켜면 오픈 1~2분 만에 예약이 마감되는 게 현실이다. A씨는 "간신히 진료받았더니 아이가 폐렴 초기 증상"이라며 "병세가 악화되면 입원이 필요하다는데 소아 병실이 부족해 제때 입원하지 못할까봐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2. B씨(여)는 밤에 아이가 아프면 오전 4시30분에 작은 낚시 의자와 경량 패딩을 챙겨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 진료시간에 맞춰 나가면 대기줄이 길어 최소 2시간가량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B씨는 "아직 새벽엔 추워서 아이는 집에 두고 혼자 나간다"며 "오전 5시30분에 대기표를 뽑았는데 48번이었다"고 밝혔다.
'어린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부모와 이웃 등 주변에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아이를 키우는 게 어렵다는 걸 의미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온 마을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병원 진료만이라도 제때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은다. 저출산 영향으로 소아의료 인프라가 감소해 진료가 가능한 소아청소년과 병원이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당일 진료는커녕 예약을 통해 일주일 뒤에 의사를 만나는 것도 어려운 실정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엔데믹 선언과 함께 야외 활동이 늘고 기온이 널뛰듯 오르내리는 요즘. 소아·청소년층을 중심으로 독감과 감기 등 호흡기 질환이 유행하면서 부모의 걱정이 깊어지고 있다. 머니S가 아픈 아이와 보호자 등이 뒤섞여 대기하는 의료 현장을 찾아갔다.
대기표 뽑고 직장 반차 내도 '무한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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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후 1시 서울 용산구에 있는 한 소아청소년과 병원. 점심시간임에도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이따금씩 들렸지만 부모는 아이를 달랠 뿐이다. 진료 대기줄이 길어 의사를 만나기까지 몇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고열로 지친 아이를 안고 있던 김모씨(20대·여성)는 "아이가 갑자기 아파 미처 예약하지 못하고 현장 진료가 가능한 곳으로 왔다"며 "아직 진료 시간이 남았는데도 로비에 사람이 붐벼 깜짝 놀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후기를 찾아보니 대기 환자가 많아 당일 접수가 종료되는 날도 있다는데 진료를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심했다.
박모씨(30대·여성)는 아픈 아이를 안고 1시간 넘게 병원에서 대기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병원 점심시간에 미리 대기표를 뽑았다"며 "시간에 딱 맞춰 오면 언제 진료를 볼 수 있을지 몰라 일찍 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소아과에서 대기 2시간은 기본인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워킹맘 김모씨(30대·여성)는 "아이 전화를 받고 급하게 병원에 왔다"며 "회사에는 잠시 아이 문제로 나갔다 온다고 했는데 대기줄을 보니 반차를 써야 할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옆에 있던 아이는 긴 대기시간에 진이 빠졌는지 소파에 반쯤 누운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티케팅' 전쟁… "둘째는 못 낳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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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키우는 부모 사이에선 '똑닥' 앱이 필수다. 병원 예약이 가능해 긴 대기시간을 피하고 원하는 시간에 진료를 받을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이마저도 이용자가 늘어 이른바 '티케팅' 경쟁이 치열하다.
서울 인근 신도시에 거주하는 윤모씨(30대·여)는 "일교차가 심해지면서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이 많이 아픈 시기"라며 "요즘 같은 시기에는 소아과 예약이 5~10분 만에 마감되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인기 소아과일수록 진료 경쟁이 더욱 치열하다.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위해 앱을 켜서 소아과 예약을 진행하려 했지만 5월 진료 일정이 꽉 차 있었다. 아이가 아파 정신없는 상황에도 진료를 받으려면 티케팅에 성공해야 하는 셈이다.
이 같은 상황에 둘째 계획을 포기한 가정이 늘고 있다. 생후 7개월 된 아이를 키우는 정모씨(40대·여)는 "병원에서 무한대기하거나 예약하기 위해 티케팅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내가 힘든 것보다 열이 나는 아이를 오랜 시간 놔두는 것이 부모로서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가 아플 때 대처하는 게 곤혹스럽다"며 "둘째는 엄두가 안 난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1월 결혼한 한 신혼부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해열제 정도는 구비하고 있지만 아이가 간이 약하기 때문에 함부로 먹일 수 없다"며 "병원에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고 의사가 처방한 약만 먹이는 것이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우리는 양가 부모님 모두 지방에 계셔서 우리 부부 외에는 아이를 케어할 사람이 없다"며 "둘째가 생긴다면 현실적으로 한명은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사라지는 소아과… 현장에선 '인프라 붕괴'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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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인프라 강국으로 알려진 한국에서 아이들이 병원에 가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소아청소년병원 수가 줄었기 때문이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 소아청소년과 병·의원 617곳이 개업했고 662곳이 폐업했다.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소아과 '진료 경쟁'은 '진료 전쟁'으로 바뀔 수도 있다. 환자를 담당할 병원과 의사 수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 소아청소년과 장래성이 부족해 전공의 모집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은 소아 의료체계 붕괴를 우려했다. 그는 "소아과 오픈런과 티케팅 경쟁의 근본적 원인은 동네 소아과의 폐업"이라며 "동네에 5개 있던 병원이 2곳으로 줄면 환자가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임 회장은 "병원이 폐업하면서 봉직의(페이닥터)들이 소아과가 아니라 요양병원이나 내과, 미용 분야로 간다"며 "수련의(인턴)들이 전공을 결정할 때 소아과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전문의·임상의(펠로우)가 줄어 소아 심장암과 미숙아 치료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해 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소아과를 살리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장에선 이미 과부하"라며 "환자가 몰리면 의사는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들고 진료를 기다리는 부모와 아이들은 지치고 병세가 나빠질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아이는 병 경과가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는 특징이 있다"며 "고열로 사망하기도 하고 패혈증과 호흡곤란 등 다양한 문제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프라 부족으로 서울 시내에서조차 열성경련 환자를 보낼 곳이 부족한 게 안타깝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