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걷다 보면 종종 강렬하고 화려한 포스터에 눈길이 꽂히곤 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아름다운 모델과 새로운 제품들이 유혹해도 포스터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이를 감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들 제 할 일에 바빠 눈길 한 번 흘깃 주고 지나갈 뿐이다. 각종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 종일 스마트폰을 쥐고 사는 세상에서 종이에 인쇄된 이미지, 정지된 영상은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거리에 붙은 포스터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지된 화면 속에 살아 숨 쉬는 영상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소리소문없이 등장한 모션포스터
2005년 할리우드의 미디어그룹 라이온스게이트는 영화 ‘하드 캔디’(Hard Candy)를 공개하며 기존과 다른 혁신적인 포스터를 온라인에 선보였다. 포스터엔 빨간 후드티를 입은 소녀가 곰 덫 위에 올라서 있는데 기존 포스터와 달리 소녀와 덫이 마치 그림자 인형처럼 덜그럭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포스터는 종이에 인쇄된 것, 따라서 움직일 수 없지만 이를 인터넷에 올리자 자연스레 멀티미디어를 활용해 동작을 가미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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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세계 최초로 모션포스터를 선보인 영화 ‘하드 캔디’ (오른쪽) 한국 최초로 모션포스터를 선보인 영화 ‘해무’ /사진=네이버 캡처 |
모션포스터는 영화 예고편처럼 다이내믹하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포스터가 움직인다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많은 기획자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밀레니엄을 전후로 플래시·애프터이팩트·프리미어 등의 제작 툴도 대중화됐기에 기술적 어려움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동영상과 포스터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 애매한 포지션 때문에 문화·예술계를 넘어 대중의 관심을 얻지는 못했다. 다행히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각종 SNS가 널리 사용되면서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증강현실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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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용 Artivive 앱 QR코드. 스마트폰 카메라로 스캔하면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Artivive 앱을 다운 받을 수 있다. |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이란 현실 세계나 사물에 디지털 정보를 덧입혀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주는 기술로 스마트폰으로 현실 세계 곳곳에 숨은 가상의 디지털 캐릭터를 찾아 육성하는 ‘포켓몬GO’ 게임이 대표적이다.
기존의 모션포스터를 증강현실로 보기 위해선 QR코드를 찾아 찍어야 했기에 사용하기가 번거로웠지만 요즘은 이미지에 스마트폰을 대면 바로 모션이 작동할 정도로 기술이 발달했다. 스마트폰에 ‘Artivive’ 앱을 깔고 ‘사진7’ ‘사진8’을 보면 지면의 정지된 이미지가 스마트폰 화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모션포스터는 상업용에서 예술작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용도로 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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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러시아아방가르드 : 혁명의 예술' 전시회. 입구에 있는 배너를 Artivive앱으로 스캔하면 움직이는 모션포스터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김영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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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러시아 아방가르드 : 혁명의 예술' 전시회 포스터 /사진제공=홍박사(hongbaks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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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플랫폼 카바라이프를 위해 제작한 모션포스터 'Acutance~brightness~'(2019). 테스트 이미지로 불리는 모니터의 영상재생성능을 테스트하는 용도의 영상물이다. 첨예도(acutance)와 밝기(brightness)를 테스트하는 10초 분량의 영상이며, 상단에는 타카하시 루미코 풍의 여성캐릭터의 옆모습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만들고 하단에는 얇은 선과 입자를 배치했다. /사진제공=배민기(@bae.minkee) |
혁신적이긴 한데… 대중화 가능할까
‘홍박사’(hongbaksa.com)는 ‘사회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인쇄 매체를 떠나 온라인 매체, 특히 영상에 치중되고 있는 시점에서 인쇄매체에 동작과 소리, 인터랙티브를 더한 모션포스터로의 확장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설명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이에 따라 사회가 변화하는데 신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 역시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가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증강, 매타 등의 등장이 중소 스튜디오에게 생존방식의 변화를 모색해야 할 만큼 큰 숙제를 안겨주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기술 덕분에 탄생했지만 이 역시도 언제 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 자신들을 도태시킬지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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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기 디자이너가 학술 심포지엄을 위해 제작한 모션포스터 'No Curator'(2017) /사진제공=배민기(@bae.minkee) |
모션포스터가 지닌 매력과 달리 이를 활용한 광고시장은 좁고 제한적이며 영세하기에 다수의 제작자들은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배민기 디자이너(@bae.minkee)는 모션포스터를 제작할 때 작품을 완성한 후 이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작업한다. 시간 차를 둔 반복된 판단을 결과물의 질과 객관성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이는 가능한 의뢰받은 주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내면화, 고정화된 부분을 살펴 이를 유동화시키려는 것이기도 하다, 오너의 요구사항 안에서 자신의 작품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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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t Up & Remove'(2016). 작품과 작품전시에 대한 다종다양한 담론적 곡예를 넘어, 아무튼 포스터를 잘 붙이고 잘 떼어내는 행위를 전시를 통하여 수행해보기 위해 기획된 전시. 작가로서의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다. /사진제공=배민기(@bae.minkee) |
기술의 변화가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아직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메타버스는 물론이고 증강현실조차 아직 미지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등장과 변화는 시나브로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누군가는 우리의 세계를 우리가 보지 못했던 색다른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다.
모션포스터는 이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어가고 있다. 혁신이 그 자체로 대중화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 노력이 우리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