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소 의류제조업체를 운영하는 A씨. 그는 업계에서 나름 유명한 브랜드를 만들어 순조롭게 회사를 키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케팅과 유통플랫폼 개척은 그에게 항상 숙제였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TV홈쇼핑(홈쇼핑)에 도전한 그는 방송 첫날 소위 '대박'을 쳤다. 당시 기록한 분당 매출은 700만원.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어 진행한 방송 판매에서 막대한 손실을 본 그는 이후 몇해 동안 홈쇼핑에 계속 도전했고, 결국 회사는 도산까지 이르게 됐다.

#. 홈쇼핑을 통해 차량 부품을 판매하는 제조사 사장 B씨. 그는 자산규모 100억원대 사업체를 꾸려가는 촉망받는 중소기업인이었다. 홈쇼핑에 진출한 지 몇달 되지 않아 그는 MD(상품기획자)의 계속되는 향응 제공 요구에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괴로웠다. 홈쇼핑 진출 초반 벤더업체가 업계 관행이라며 향응 접대비용을 요구해 몇번은 들어줬지만 점차 요구하는 금액이 늘어갔다. 심지어 MD는 차량 견적서를 보내 본인 앞으로 보내달라는 주문을 하기도 했다. 더욱이 B씨의 회사는 홈쇼핑사와 직접 거래가 가능한 규모와 인지도를 가진 업체였음에도 불구, MD는 굳이 특정 벤더사를 거쳐 거래할 것을 요구했다. 알고보니 그 벤더사는 홈쇼핑 자회사 임원 출신이 차린 회사였다. 압박을 이기지 못해 홈쇼핑 방송판매를 할 수 없었던 B씨는 결국 다른 판로를 찾지 못한 채 도산했다.


 

/사진=머니투데이DB
/사진=머니투데이DB

◆중소업체 "알고도 당하는 불나방"

“제조업체로서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지만 치명적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홈쇼핑 때문에 대박부터 쪽박까지 경험했다는 한 제조업체 사장의 말이다.

마케팅 수단이 부족한 데다 판매 플랫폼이 부족한 중소업체로선 홈쇼핑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6개 홈쇼핑사의 영업이익은 날로 늘어나는 데 비해 홈쇼핑으로 성공한 중소업체는 드물다는데 있다. 또한 홈쇼핑 거래구조 특성상 슈퍼갑 위치에 있는 홈쇼핑사의 요구에 중소업체들은 뒷돈거래도 마다할 수 없는 실정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지난해 홈쇼핑시장 규모는 8조7800억원에 달한다. 홈쇼핑 출범 첫해인 지난 1995년 시장규모 34억원에서 19년새 2600배나 성장한 것. 시장규모 뿐아니라 홈쇼핑사들의 내실도 탄탄해졌다. 홈쇼핑 6개사는 한해 평균 15% 이상의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이들이 거둔 전체 영업이익은 6844억원에 달한다.

반면 홈쇼핑과 거래하는 제조업체들의 상황은 홈쇼핑사와 극명히 엇갈린다. 홈쇼핑과 거래하려면 일반적으로 수억원어치의 제품을 제작할 정도로 재무구조가 탄탄한 기업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에 따르면 지난 3년간 홈쇼핑 거래업체 중 153개 기업이 조세체납 등 부실상태에 이른 것으로 조사됐다.

◆100만원 매출에 33만원은 홈쇼핑 몫

수많은 중소업체들을 도산까지 몰고가는 홈쇼핑업계의 문제점은 도대체 무엇일까. 업계 관계자들은 막대한 수수료와 정액제 강요, 통행세를 챙기는 빅벤더, 허술한 관리·감독 등을 고질적 병폐로 꼽는다.

정우택 의원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홈쇼핑업체들이 제조업체들로부터 받은 수수료는 17조5000억원에 달했다. 이들의 총 매출액이 52조8000억원임을 감안하면 평균적으로 물품 원가의 33.1%에 달하는 비용을 수수료로 챙긴 셈이다. GS홈쇼핑이 지난해 중소업체에게 받은 수수료율은 37.9%에 달했다.

중소기업 전용 홈쇼핑으로 기획된 홈&쇼핑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 홈&쇼핑 수수료율은 31.5%로 평균 수수료율보다 고작 2.9% 낮은 수준이다. 이로 인해 홈&쇼핑은 창립 2년8개월만에 20%에 가까운 영업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통상 수수료에는 송출수수료, 콜센터 비용, 물류비, 카드수수료, 황금시간대 편성을 위한 리베이트, 소비자가 반품할 경우 발생하는 수수료까지 포함돼 있다. 그러나 막대한 비용에도 불구하고 제품을 다 팔지 못해 물류창고에서 물건을 빼내오는 물류비나 재고부담은 고스란히 제조업체 몫이다.

수수료 지급방식도 문제다. 납품업체 입장에선 실제 판매가 완료된 제품에 대해 수수료를 지급하는 정률제가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홈쇼핑 대부분은 위험부담을 꺼려 정액제(판매실적과 상관없이 정해진 수수료를 받는 방식) 방식을 강요한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처음 계약을 할 때는 ‘정액제 3회’라는 식으로 계약을 해야 한다. 황금시간대로 편성받지 못하면 물건이 팔리지 않아도 막대한 수수료를 지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퇴직 홈쇼핑 임원 영입하는 빅벤더

제조사들의 부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홈쇼핑사와 납품업체 사이에서 로비를 전담하는 벤더업체 때문이다. 대부분의 홈쇼핑사들은 취급하는 상품의 약 70% 이상을 벤더를 통해 상품을 선정한다. 벤더들은 황금시간대를 편성받거나 홈쇼핑 론칭 여부를 결정하는 MD나 본부장, 임원 등 홈쇼핑사 출신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최근엔 벤더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빅벤더 업체들이 등장했고 영향력은 막강해졌다.

한 납품업체 관계자는 “홈쇼핑 MD를 어렵게 만나도 벤더를 먼저 만나고 오라고 말한다”며 “벤더는 다리를 놔주고 10%에서 많게는 15%까지 수수료를 챙겨간다. 중소업체가 망해도 홈쇼핑과 벤더가 살아남는 이유”라고 토로했다.

벤더들의 로비는 현직 홈쇼핑사 직원 뿐 아니라 전직 홈쇼핑 직원들에게도 뻗어 있기 때문에 쉽사리 유착을 끊지 못한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최근엔 상품을 발굴해 기획하는 홈쇼핑사 MD나 품질검사팀의 역할을 벤더가 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인터넷 홈쇼핑업체 라이브킹 김현기 대표는 “과거 홈쇼핑사는 중소업체들의 제품을 발굴하는 역할을 하는 순기능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벤더가 알아서 자본력을 갖추고 수익이 남을 중소업체를 걸러 홈쇼핑으로 이어주는데 굳이 홈쇼핑사가 위험을 부담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구조적 문제로 솜방망이 처벌은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는 강경론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일부에서는 홈쇼핑사들의 재승인을 취소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문병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2012년에도 홈쇼핑업체의 납품비리가 대대적으로 밝혀졌지만 불과 2년 만에 또 다시 롯데홈쇼핑에서 동일한 납품비리가 발생했다”며 “퇴출 가능성까지 열어 놓고 재승인 심사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홈쇼핑업계 관계자는 “최근 잇단 비리가 불거지면서 홈쇼핑업체들은 내부 권한을 분산시키고 견제 장치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실효성은 의문이다. 롯데홈쇼핑 사례에서 드러났듯 담당 분야 전체가 똘똘 뭉쳐 비리를 저지르고 나눠먹는 관행을 고치기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5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