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8일 오후 4시30분. 서울 신사동 호림아트센터에선 경매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실외까지 울려 퍼졌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경매사는 속도감 있는 진행과 정확한 의사전달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서울옥션이 초보 컬렉터를 위해 올해 처음 개최한 오프라인 경매 ‘2015 마이 퍼스트 컬렉션’(My first collection)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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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한별 기자 |
◆고가 낙찰에 환호·박수 터져
이날 경매는 오후 4시 정각에 막이 올랐다. 현장엔 200여명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서울옥션 측은 지난해보다 참가자가 두배가량 늘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기자가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40분. 경매에 참가하려는 사람들 때문인지 이날 주차장은 만차였다.
첫 경매는 송형노 작가의 ‘Dream Boy-Yangsuni & Yanddori’로, 최저가가 120만원이었는데 이보다 조금 낮은 100만원에 낙찰됐다. 경매에서 낙찰까지 걸리는 시간은 1~2분. 초보 컬렉터를 위한 행사인 만큼 평균 낙찰가는 개당 500만~600만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응찰자들의 뜨거운 경쟁은 평균가를 훨씬 웃돌았다. 이날 경쟁이 치열했던 작품은 박서보의 ‘묘법 No. 25-75’. 최저가 1300만원에서 시작했는데 100만원씩 호가, 5000만원까지 뛰어올랐다. 최종 낙찰가는 시작가의 4배가 넘는 5500만원. 경매사가 낙찰봉을 두드리자 내부에선 환호와 박수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작품의 호가가 높을수록 바쁜 사람들은 ‘스페셜리스트’다. 이들은 서울옥션 직원들로 현장에 오지 못한 회원에게 전화로 경매가격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인원은 20~30명으로 추정된다.
검은 정장 차림의 한 여성은 휴대전화로 “4000만원 최고, 4100만원 받으시겠어요? 4100만원 받았습니다. 4200만원 최고, 그만 할까요?”라며 사전 예약한 회원들에게 현장의 경매가격을 알리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현장에 온 고객과의 경쟁도 대부분 스페셜리스트의 몫이었다. 앞쪽 좌석에 앉아 있던 한 남성은 수십여분가량을 차분하게 기다린 후 윤형근 화백의 ‘Burnt Umber & Ultramaline Blue’ 입찰에 도전했다. 그는 경매가 시작되자 자신의 번호가 담긴 패들(번호표)을 들어 올리고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7500만원에 시작된 이 작품은 채 2분도 지나지 않아 호가가 1억원을 넘었다. 그리고 이 남성과 휴대전화를 통해 대리구매에 나선 스페셜리스트 두명의 경쟁으로 압축됐다. 현장에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는 두 사람에게 쏠렸다. 호가는 1억1000만원, 1억2000만원을 넘더니 순식간에 1억400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이 남성은 머뭇거리더니 결국 올렸던 팔을 내렸다. 최종 낙찰금액은 1억4000만원, 대리 구매자의 승리였다. 다시 한번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작품은 이날 최고낙찰가를 기록했다.
회원이 스페셜리스트 역할을 자처한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한 여성고객은 휴대전화를 들고 권수현의 ‘정상에서 만나자, Meet at the Top’ 작품에 응찰했다. 그는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1500만원까지 올랐어. 포기하자. 더 가자고?”라며 번호가 적힌 패들을 수차례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그는 끝내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가 찜한 작품은 대부분 높은 가격에 팔렸다. 권수현의 작품은 다른 사람에게 1900만원에 낙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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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한별 기자 |
◆2주 전 작품 선정… 경매에 몰리는 ‘돈’
이날 경매는 오후 4시에 시작해 오후 5시30분께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최종 마무리 시간은 오후 7시. 당초 예상보다 1시간30분이나 더 지체됐다. 그만큼 경쟁이 뜨거웠다는 의미다.
낙찰 총액은 13억6000만원이며 낙찰률은 77%(156건 중 120건 낙찰)였다. 서울옥션 측은 지난해보다 두배가량 오른 수치라고 말했다. 그런데 기자의 눈엔 뭔가가 부족해 보였다. 경매현장엔 경매순서와 작품, 작품명이 적힌 카탈로그와 실시간 입찰가격을 알려주는 대형스크린이 전부였다. 수백~수천만원의 돈이 오가는데 현장준비가 다소 미흡한 느낌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회원들은 이미 2~3주 전부터 작품의 가치와 작가, 최저·최고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다. 서울옥션은 경매가 열리기 한달 전부터 회원을 모집하고 고객이 원하는 작품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공유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따라서 회원들은 미리 작품에 대한 예비가격을 생각하고 경매에 응할 수 있다.
현장에 오지 않더라도 서면응찰을 통해 경매 참여가 가능하다. 예컨대 마음에 드는 작품을 500만원에 서면응찰 했다면 실제 경매에서 응찰금액이 500만원을 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서면 응찰자에게 낙찰된다. 만약 서면응찰을 하지 않은 회원이 현장에서 서면응찰자와 똑같은 가격을 제시했다면 서면 응찰자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현장보다 먼저 가격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서울옥션 관계자는 “경기가 힘들다지만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최근 미술경매에 높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며 “당분간 경매시장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전두환 일가 미술품, 경매시장서 ‘완판’
‘72억8194만원’.
전재산이 29만원뿐이라던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로부터 검찰이 압류한 미술품을 경매에 부친 결과 낙찰된 총 금액이다. 그의 일가에서 나온 미술작품은 총 64점. 지난해 3월까지 6차례에 걸쳐 진행된 경매에서 최고가는 이대원 화백의 ‘농원’으로 6억6000만원에 낙찰됐다.
추정가 150만~400만원에 나온 ‘충효명예 인내군자도’, ‘천상운집’, ‘휘호’ 등 전 전 대통령의 글씨 3점은 모두 추정가를 훌쩍 뛰어넘은 500만원대에 팔렸다. 이 돈은 경매수수료를 제외하고 전액 국고로 환수된다.
미술과 경매업계에선 전 전 대통령의 경매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고 평가한다. 압류한 미술품이 완판으로 시작해 완판으로 끝나면서 경매시장과 미술업계에 때 아닌 훈풍이 분 것이다.
미술경매업계 관계자는 “처음엔 전 전 대통령 일가의 컬렉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지만 지금은 미술품에 관심 갖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며 “미술품이 제 가치를 인정받아 국고 환수에 도움을 주고 덩달아 대중의 관심도 커져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6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