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1년 2월7일. 6.25 전쟁이 한창이던 이날 경남 산청군 가현마을·함양군 점촌마을 등 4개 마을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국군이 주민 705명을 사살한 것이다. '통비분자', 즉 공비들과 내통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단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양민학살은 이날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2월9일 거창군 신원면 내찬마을 골짜기에서 주민 136명, 2월11일 박산계곡에서 527명이 같은 이유로 총탄 아래 스러졌다. 무려 총 1368명의 민간인이 국군(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사살당했다. 역사 속 비밀리에 묻힌 참극이었다.
집단학살은 국군 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 9연대(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에 의해 자행됐다. 이들은 기관총, 소총, 수류탄, 유류(기름) 등으로 무장한 채 지리산 동남부 일대를 돌며 주변 마을에 들이닥쳤다.
작전명령 제5호는 손자병법의 '견벽청야'(堅壁淸野 : 지킬 곳은 견고한 벽을 쌓고 나머지 지역은 빈 들판만 남겨라)로 "작전 지역 안 인원은 모두 총살하라"라는 지시였다. 사람과 집, 식량을 모두 불태워 적이 이용할 여지를 없앤다는 이 뜻은 일명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었다.
산청·함양·거창군에 거주하던 시민 1368명이 빨치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이 땅에서 사라졌다. 이 가운데 거창 사건의 사망자를 제외하고 산청·함양군에서만 705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온 가족이 몰살돼 사망신고를 하지 못한 이들은 제외됐으며 386명만이 공식적인 사망자로 기록됐다. 이 중에는 10대 어린이가 175명으로 절반에 육박했고 61세 이상의 노인과 성인 여성은 110명에 이르렀다.
쿠데타 정권의 '두번째 학살'… 은폐된 진상
|
자칫 묻힐 뻔한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그해 3월 거창 출신 신중목 국회의원의 폭로 덕분이었다. 진상조사단이 구성됐지만 군 당국은 사건 현장에 방치된 어린이 시체를 근처 계곡으로 옮겨 암매장하는 등 만행을 계속했다.
진상조사 방해에도 외신 등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 '군이 용공분자 187명을 처형한 사건'이라는 허위 담화문을 발표했다.
사건을 은폐하려는 정부와 군당국의 움직임에도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5월8일 국회 결의로 진상이 공개됐다. 같은해 12월16일 대구고등군법회의는 9연대장 오익경 대령에게 무기징역을, 3대대장 한동석 소령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양민학살이 발생한 지 10개월여만이었다. 하지만 재판은 산청·함양사건이 은폐된 채 진행됐고 거창사건 희생자는 150여명으로 축소됐다.
실형을 받은 학살 관련 군 관계자들은 1년 후 특별 사면돼 복직하거나 경찰 간부가 됐다. 한동석·오익경도 1년이 채 되지 않아 사면됐고 현역으로 복직했다.
4.19혁명 직후 이 사건을 조사한 국회는 산청·함양 양민 학살사건의 실체를 밝혀냈다. 하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유족들은 또 다시 침묵을 강요받았다. 명예회복은 고사하고 유족회는 아예 '반국가단체'로 몰렸다.
정부는 유족들이 만든 합동묘소를 파헤쳐 위령비를 쓰러뜨리기도 했다. 현존하는 피해자, 생존 유족 732명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연좌제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끝나지 않은 전쟁, 70년 침묵에 대한 배상은?
|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88년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땅 속 깊이 파묻혔던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도 재조명됐다.
1996년에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15대 국회에서 통과됐다. 45년 기다림의 결과였다. 1998년에는 거창과 산청에 각각 추모공원이 건립됐다.
2004년에는 희생자에 대한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 유족들의 소리 없는 싸움이 마침내 끝을 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배상금액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정부는 거부권을 행사해 법안은 폐기됐으며 이로써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은 지금까지도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사건이 일어난지 70여년이나 흘렀지만 아직도 보상받지 못한 생존 유족 732명의 한 맺힌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한 유족은 "국가가 저지른 일에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게 당연하다"며 "아홉살 때 일어난 일이 70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되지 못한 게 원통하다"고 토로했다.
사건을 기억하는 1세대 유족들도 점점 세상을 떠나고 있다. 진정한 배상과 보상의 시간이 빨리 돌아와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