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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6월3일.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상에 반대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6월3일 계엄령을 선포하며 당시 절정에 이른 한·일국교정상화회담 반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6월3일 선포된 계엄령은 같은해 7월29일 해지됐다.
6·3항쟁 시위가 된 서울대 단식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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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2월 박정희 정부는 3월 안에 일본 교섭의 기본 방침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정을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은 일반 여론의 추세를 무시한 채 3억달러의 청구권 보상에 만족하며 한국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본에 내주는 굴욕 외교를 행했다.
이에 반발한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1964년 5월30일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고 한·일 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이었던 김덕룡씨는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을 진행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 수가 점점 늘어났다.
대학생들은 서울 시내의 거리로 나와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964년 6월2일 고려대, 서울대 법대, 서울대 상대생을 필두로 진출해 시위를 주도하자 서울 지역의 대학생들이 이에 동참하며 항쟁이 시작됐다.
서울대 단식농성에 이어 각 지역의 대학에서는 관을 준비하며 한·일 협상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의장에 대한 규탄 성명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민주적 민족주의 장례식을 열었다.
이밖에도 시민사회단체와 윤보선·장택상·박순천 국회의원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도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한·일협상 반대 또는 한·일협상 조건 재수정을 외쳤다.
1964년 6월초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6월3일 낮 12시에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벌였다. 일제히 서울 시내 거리로 나온 약 1만2000명의 학생은 경찰과 충돌하면서도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를 행하던 학생들은 경찰의 최루탄 공세에 결국 학교로 철수했다. 하지만 이 시위는 6·3 항쟁의 시발점이 됐다.
서울 18개 대학 1만5000여명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국회의사당을 점령했다.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박정희 정권은 6월3일 밤 9시40분에 선포하기로 한 계엄령을 오후 8시로 소급해 서울시 전역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시작된 언론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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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는 인혁당이 한·일 협정 반대 이슈를 선동해 배후 조종해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란 사건으로 규정했다. 박정희 정권은 6월3일 오후 6시30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금지와 진압, 언론검열, 대학 휴교 등 주동자 검거에 나섰다.
시위의 주동 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검거됐다.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방송 담화를 통해 6·3 항쟁 시위를 "야당 정치인들의 선동이며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공부에 매진해 달라"고 강조했다.
1964년 6월6일 계엄령이 선포된 지 3일 뒤에 무장 군인들은 학생들에게 호의적이던 동아일보사에 심야에 침입해 위협 공갈을 가했다. 이는 당시 동아일보가 친민주당, 친신민당계 언론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에 윤보선 의원은 "언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탄압이며 나아가 언론 그 자체를 말살하려는 독재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서울 시내에 경찰과 계엄군이 투입돼 1964년 7월28일 시위는 진압됐고 이튿날인 29일 계엄령은 해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