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정수영 기자 = 25년 전만 해도 뮤지컬은 국내 공연계에서 '비주류 장르'로 취급받았다. 연극의 하위 카테고리로 분류되며 존재감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시장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몸집을 키웠다. 2000년 전후 연간 100억 원 수준이던 매출 규모는 지난 2024년 4652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한국은 이제 미국, 영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 뮤지컬 시장으로 꼽힌다. 특히 지난 6월 토종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공연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미국 토니상 시상식에서 6관왕을 휩쓸며 케이(K)-뮤지컬의 국제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불과 20여 년 만에 이뤄낸 비약적 성장이다. 비결을 짚어봤다.
라이선스 작품 대거 유입…창작 뮤지컬 '봇물'
전문가들은 '콘텐츠 공급 확대'를 첫 번째 요인으로 꼽는다. 2000년대 들어 '지킬앤하이드', '시카고', '맘마미아!' 등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이 국내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2001년 국내 상륙한 '오페라의 유령'은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당시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 제작비가 20억~30억 원 수준이었는데, '오페라의 유령'에는 무려 140억 원이 투입됐다"며 "블록버스터 영화 서너 편을 만들 돈을 몇 개월 공연에 쏟아붓는다고, 당시 프로듀서였던 설도윤 씨는 '돈키호테'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우려와 달리 '오페라의 유령'은 대성공을 거뒀다. 7개월간 244회의 공연을 이어가며 192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원 교수는 "'오페라 유령' 이전까지만 해도 뮤지컬은 흔히 '배고픈 예술'로 여겨졌지만, 이 성공을 계기로 '뮤지컬도 잘 만들면 돈이 되는 장르'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창작 뮤지컬의 약진도 이어졌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는 해외 라이선스 작품이 시장을 주도했지만, 2010년대 들어 창작 뮤지컬이 양적으로 성장하며 흐름을 바꿨다. 물론 '명성황후'(1995년), '빨래'(2005년), '영웅'(2009년) 같은 작품도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제작이 활기를 띤 건 2010년대부터다. 이 시기 창작 뮤지컬은 라이선스 작품과 차별화된 매력을 보여주며 새로운 관객층 유입에도 기여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종규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시장의 80~90%를 라이선스 뮤지컬이 차지했지만, 지금은 창작 뮤지컬 비중이 50% 이상으로 늘었다"며 "다양한 규모의 창작 작품이 쏟아지면서 공급이 확장되고 시장도 한층 두터워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처럼 창작 뮤지컬이 활발히 제작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며 "국내에서는 매년 30편 이상이 새롭게 무대에 오르는데, 뉴욕 브로드웨이나 영국 웨스트엔드에서도 이 정도 규모는 보기 어렵다"고 했다.
뮤지컬 전용극장 등장…"우리 배우들 실력 뛰어나"
공연 인프라 확충도 성장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 2000년대 이전에는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국립극장 같은 공공극장이 무대의 중심이었지만, 이들 극장은 뮤지컬뿐 아니라 발레·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복합 공연장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뮤지컬 공연만 몇 개월씩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다 2006년 샤롯데씨어터를 시작으로 블루스퀘어, 디큐브아트센터 등 뮤지컬 전용 극장이 속속 문을 열었다. 전문가들은 "전용 극장의 등장은 장기 공연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곧 안정적인 관객 확보로 이어졌다"며 "결과적으로 뮤지컬 시장의 규모와 소비를 키운 핵심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우수한 배우들도 뮤지컬 시장 성장을 견인한 주요 요소로 꼽힌다. '티켓파워 강자' 조승우, 옥주현, 김준수 등 스타 배우는 물론, 아이돌 출신 배우들까지 무대에 오르면서 젊은 세대가 뮤지컬 관객으로 유입됐다. 이들은 단순 관람을 넘어 반복 관람하는 '회전문 관객' 문화를 형성하며 시장 규모를 빠르게 키웠다고 공연 전문가들은 말한다.
원종원 교수는 "스타 캐스팅은 높은 출연료와 멀티캐스트에서 특정 배우 쏠림 현상이라는 문제를 낳기도 했지만, 뮤지컬 시장 확장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고희경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 배우들은 실력이 뛰어나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 무대에서도 충분히 잘 해낼 것"이라며 "일례로 뮤지컬 '킹키부츠' 앙상블은 해외 무대에 그대로 수출하고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뮤지컬 업계는 경쟁이 치열하지만, 후배들은 뛰어난 선배들을 보고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기량을 높여 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렇듯 라이선스와 창작 뮤지컬 등 콘텐츠 공급의 다변화, 전용 극장 설립, 배우들의 활약 등 여러 요인이 맞물리며, 한국 뮤지컬 시장은 단기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 세계 4위 시장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