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제: 데이터 독점과 규제의 한계
첫째, 데이터 독점과 신뢰성 문제 새로운 가치 창출의 핵심 재료인 데이터의 투명하고 공정한 흐름은 시장 신뢰의 기반이 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데이터는 이미 소수의 빅테크 기업에 의해 중앙화되고 독점되어 새로운 참여자의 진입을 막고 있다. 여기에 딥페이크와 같이 데이터의 신뢰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기술이 확산되고 있으며, 데이터 공유와 프라이버시 보호 사이의 딜레마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결국 미래 신뢰 기반의 핵심 재료인 데이터 자체가 불완전하고 편향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둘째, 규제 프레임워크의 한계 신뢰 구축의 또 다른 축인 규제 역시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 있다. AI 기술의 발전 속도를 법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보조 맞추기 문제'는 거대한 규제 공백을 낳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시장 참여를 위축시키고, 각국의 데이터 주권 강화 움직임은 글로벌 상호운용성을 저해하며 규제 파편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특히 탈중앙화 시스템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 소재를 가리기 어려운 법적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현실적 대안: 유럽의 신뢰 프레임 + 인도의 개방형 파이프라인
이러한 난관 속에서 세계 각국은 저마다의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유럽과 인도의 사례는 우리에게 전환기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유럽연합(EU)의 'AI 법(AI Act)'은 규제가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기술을 위험 등급에 따라 차등 관리하는 '위험 기반 접근법'을 채택했다. 이러한 접근은 '신뢰 우선'의 다층적 거버넌스 위에서 이루어지게 되고 한정된 규제 자원을 고위험 영역에 집중하는 효율적인 방식이다. 또한, '유럽 블록체인 서비스 인프라(EBSI)'는 국경을 넘는 상호운용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럽은 이처럼 새로운 환경에 맞는 '신뢰의 프레임', 즉 확장된 신뢰 구축을 위한 기둥(column)을 세우는 데 집중하고 있다.
반면 인도는 '시장 우선'의 개방형 프로토콜로, 정부가 소유권을 주장하는 대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개방형 기술 표준을 제공하는 '개방형 파이프라인' 전략을 선택했다. 대표적인 예가 통합 결제 인터페이스(UPI)로, 수많은 민간 기업이 이 위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며 거대한 혁신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는 민간 주도의 혁신을 촉진하는 섯가래(beam) 역할에 집중한 성공 사례이다.
우리의 전략: 하이브리드 모델과 토큰 경제
AI 시대를 선도하기 위한 대한민국의 전략은 유럽의 '신뢰 프레임'과 인도의 '개방형 파이프라인'의 장점을 결합한 '절충적 하이브리드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첫째, EU의 AI 법처럼 기술과 서비스를 위험 등급에 따라 차등 관리하여 규제의 효율성과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 둘째, 인도의 UPI(Universal Payment Interface)처럼 개방형 기술 표준과 프로토콜의 상호운용성을 보장하여 민간의 혁신을 촉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프라이버시 강화 기술(Privacy Enhancing Technology)처럼 설계 단계부터 신뢰가 내재된 기술 개발을 장려하여 법과 제도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기술이 스스로 보완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러한 사전준비하에서 새로운 법적 신뢰주체들의 입체적 협업은 생태계조성에 맞추어지게 된다.
이러한 기술 기반 신뢰 설계의 가장 구체적인 실험 모델이 바로 토큰 경제다. 토큰 경제는 유럽의 '신뢰 프레임'과 인도의 '개방형 파이프라인'의 장점을 결합하여, 풀뿌리 단위에서부터 시장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디지털 생태계에 대한 모든 기여가 정당하게 인정받고 보상받을 수 있도록, 금융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다양한 실험에 적극 나서야 하고 이를 위한 규제샌드박스 전략을 활용해야 한다. 단, 생태계조성을 위한 토큰이 당장 화폐적 시각이 아닌, 디지털 시대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보상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AI 시대의 국가 경쟁력은 단순히 기술 도입 속도가 아닌, 신뢰를 설계하는 안목과 깊이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데이터 독점과 규제 파편화라는 현실적 장벽을 넘어,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경쟁력도 몰라보게 강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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