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정수영 기자 = 지난 27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세종솔로이스츠의 협연은 관객에게 마치 신대륙을 항해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했다. 베르베르의 글은 나침반처럼 방향을 제시했고, 작곡가 김택수가 쓴 악보는 지도처럼 세밀한 음악적 풍경을 펼쳐냈다.
공연 제목은 '키메라의 시대'. 그의 신작 소설 '키메라의 땅'에서 따왔다. 베르베르는 이번 무대를 위해 직접 대본을 쓰고 낭독자로 무대에 올랐다. 김택수는 그 대본을 토대로 총 8악장, 약 40분 분량의 곡을 완성했다. 연주는 실내악 단체 세종솔로이스츠, 플루티스트 최나경, 기타리스트 드니 성호가 맡았다.
소설 '키메라의 땅'은 제3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세상에서 새로운 지배 종족 '키메라'가 등장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베르베르가 그린 키메라는 인간과 박쥐의 혼종인 '에어리얼', 인간과 두더지의 혼종 '디거', 인간과 돌고래의 혼종 '노틱'까지 총 세 종족이다. 이들은 각각 하늘을 날 수 있고, 땅속을 파고들어 지하에서 생활할 수 있고, 물속을 헤엄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신인류다.
김택수는 공연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노트를 통해 "소설이 인간과 동물의 혼종인 키메라의 이야기라는 점에 착안해, 구인류(순혈 인간)를 상징하는 바로크 음악 형식을 '돌연변이같이' 변주했다"며 "멜로디나 코드 등에 바로크 음악에서 나타나지 않는 현대적인 아이디어를 더해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고자 했다"고 전했다.

이번 공연은 베르베르가 약 1~2분간 대본을 먼저 낭독하면 이어서 곡이 연주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는 불어로 대본을 읽었고, 무대 중앙 스크린에는 한국어 번역 자막이 함께 띄워졌다. 각 악장의 연주 시간은 약 5분으로 비교적 짧았다.
특히 5악장 '에어리얼'에서는 플루트의 매력이 두드러졌다. 하늘을 나는 이 신인류가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빠르게 움직이고, 고도를 높여 비상하거나 저공비행 하는 모습을 맑고 투명한 플루트 선율로 눈앞에 그려내듯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어 세 종족의 분열과 반목을 담은 6악장 '갈등들'에서는 휘몰아치는 서사의 긴장감이 음악 속에 생생히 녹아들었다. 갈등이 치솟는 서사에 맞춰 음악 역시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격정적인 연주가 끝나자, 베르베르는 "와우!"를 외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반응에 객석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지영 음악 칼럼니스트는 뉴스1에 "책 속 이야기를 바탕으로 곡을 쓰고, 낭독과 함께 진행한 점이 신선하고 재미있는 기획이었다"며 "음량이 작은 기타를 활용해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낸 것도 흥미로웠다"고 했다.
이어 "음악가들이 뛰어난 연주로 곡을 더욱 살아나게 한 것을 보며, 결국 작품을 완성하는 힘은 연주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공연은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의 프로그램의 하나로 열렸다. 이 축제는 클래식 음악의 동시대성을 탐구하고 현대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소개하는 자리로, 라틴어 '힉엣눙크'는 '여기 그리고 지금'을 뜻한다. 오는 9월 5일까지 예술의전당을 비롯해 이화여대, 광진어린이공연장 등에서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