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경제 기적을 이끈 외국인투자(FDI)의 거점인 더블린 실리콘 독스(Silicon Docks)가 아일랜드 스타트업을 성장시키는 거점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진은 더블린 실리콘 독스에 위치한 구글 사옥. /사진=최유빈 기자


2005년 더블린의 한 골목에서 문을 연 아일랜드의 작은 스타트업이 만들 솔루션이 20년만에 전 세계 자동차의 8분의 1에서 사용되고 있다. 200개국 2500만대 자동차가 이 회사의 솔루션을 통해 외부와 연결돼 정보를 주고받는다. 폭스바겐·아우디·포르쉐·GM·혼다 등 글로벌 완성차 브랜드들이 주고객이다. 일본 소프트뱅크가 약 7000억원을 투자했다. 작은 섬나라 아일랜드를 세계 모빌리티 산업의 중심에 올려놓은 커넥티비티 솔루션기업 '큐빅'(Cubic³)의 이야기다.

빅테크가 일군 'ICT의 실험실'

메타(왼쪽)과 아마존(오른쪽)이 유럽연합(EU) 시장 거점으로 글로벌 개방성을 갖춘 아일랜드 더블린을 택했다. 덕분에 아일랜드 토종기업들은 이들의 사업 방식에서 영향을 받아 전례없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사진=최유빈 기자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역동적인 스타트업 생태계를 갖춘 나라다. 그 중심에는 수도 더블린 남동부의 '실리콘 독스'(Silicon Docks)가 있다. 구글, 메타, 링크드인,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IT기업들이 유럽 본부를 둔 곳으로, 현재 아일랜드 스타트업 약 2200개 중 절반 이상이 이 지역에 몰려 있다.

빅테크의 집결은 단순한 사무소 이전이 아니었다. 구글은 유럽 데이터센터와 광고 플랫폼의 테스트베드를 더블린에 두었고, 메타는 인공지능 윤리연구소와 콘텐츠 검증센터를 운영 중이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유럽 내 최대 규모의 클라우드 데이터센터를 세워 인프라 경쟁을 주도했다. 이들이 창출한 기술 수요와 고용은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전반으로 확산됐다.


아일랜드 중앙통계청(CSO)와 투자진흥청(IDA)에 따르면 ICT·디지털 관련 산업은 GDP의 10% 이상, 수출의 약 40%를 차지하며 아일랜드의 주요 수출 산업으로 꼽힌다. 외국계 기업들은 연구개발(R&D)과 급여, 현지 서비스 구매 등을 포함해 한 해 동안 390억 유로(약 65조원) 이상을 지출했다. 다국적기업 고용 인원도 30만명을 돌파했다. 대학과 산업계가 맞물리며 고숙련 인재와 기술이 순환하는 '지식 생태계'가 완성된 셈이다.

이 같은 환경은 스타트업 성장의 토양이 됐다. 글로벌 기업은 혁신 기술의 첫 고객이자 까다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훈련장' 역할을 하고, 빅테크 출신 인재들은 스핀오프 형태로 창업 시장에 유입되며 선순환을 이끌었다.

폭스바겐과 아우디를 고객으로 둔 큐빅 역시 이 생태계가 길러낸 대표적 성공 사례다. 데이브 켈리 큐빅 최고기업책임자(CCO)는 "'실리콘 독스'는 큐빅 성장의 중추적인 무대였다"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과 데이터 과학 분야 인재가 풍부해 글로벌 솔루션 팀을 꾸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글로벌 기술기업 및 투자자들과의 근접성이 지식 공유와 협력 문화를 자연스럽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2005년에 설립된 Cubic³은 SDV(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를 위한 커넥티비티 솔루션 분야의 글로벌 리더로 성장했다. /사진= 큐빅(Cubic³)

정부가 키운 '글로벌 스타트업 사관학교'

아일랜드 기업진흥청(Enterprise Ireland, 이하 EI)은 자국 토종 기업의 글로벌 진출을 돕는다. 사진은 EI 더블린 본사. /사진=최유빈 기자

아일랜드 정부의 적극적인 육성정책도 ICT 강국으로 도약한 배경이다. 자국 기업 육성을 담당하는 아일랜드 기업진흥청(Enterprise Ireland, 이하 EI)은 창업 초기부터 수출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전 단계를 지원한다. 창업 희망자에게는 종잣돈과 멘토링을, 성장기업에는 연구개발(R&D)과 해외 진출 자금을 제공한다.


EI는 큐빅이 기업가치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를 넘어서는 유니콘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초창기 큐빅은 글로벌 시장 진출이라는 벽 앞에서 번번이 부딪혔다. 각국의 복잡한 통신·데이터 규제를 충족하면서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인력과 자금 모두 한정돼 있었고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와 신뢰를 쌓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 EI가 고성장 스타트업을 위한 HPSU(High Potential Start-Up) 프로그램을 통해 자금과 컨설팅을 제공했고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과 직접 연결해주는 네트워킹 기회를 마련했다.

켈리 CCO는 "사업 초기 가장 큰 과제는 글로벌 자동차 시장 진출이었는데 EI가 그 난관을 풀어줬다"며 "무역 사절단과 네트워킹 프로그램을 통해 주요 OEM의 의사결정권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고 이는 첫 국제 계약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EI는 현재 '제2의 큐빅'을 키우기 위한 중장기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4년 한 해 동안만 157개 스타트업에 총 2760만 유로를 투자했고 정부와 민간 벤처캐피털을 합한 기술 스타트업 투자액은 14억8000만 유로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EI는 2029년까지 신규 스타트업 1000개를 창출하고 수출액을 500억유로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안나 마리 터리 EI 총괄은 "초기 자금 조달과 인재 유지 문제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보고 지원 제도와 펀딩 규모를 확대하고 있다"며 "민첩하고 포괄적인 혁신 생태계를 구축해 아일랜드를 글로벌 ICT 중심지로 공고히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