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HD현대 회장이 취임 후 첫 공식 일정으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에 참석해 인공지능(AI), 친환경 선박 혁신 등 미래 조선 비전을 제시했다.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를 통한 미국 진출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정 회장 체제에서 그룹의 미래 사업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HD현대는 27일 경주엑스포대공원 문화센터 문무홀에서 APEC CEO 서밋 '퓨처 테크 포럼: 조선'을 개최했다. 이날 기조연설을 맡은 정 회장은 혁신 기술을 통한 조선업의 지속가능한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글로벌 협력을 당부했다.
정 회장은 "인공지능(AI)은 선박의 지속가능성 및 디지털 제조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산업의 경계를 넘어서는 긴밀한 글로벌 혁신 동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HD현대는 첨단 역량을 기반으로 미국의 해양 르네상스를 위한 든든한 파트너로 여정에 함께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덧붙였다.
정 회장은 회장 승진 이후 줄곧 '미래 경쟁력 강화'와 '위기 극복'을 강조해왔다. 지난 20일 사내 메시지를 통해 "HD현대는 위기를 돌파하는 DNA를 가진 기업"이라며 "인류의 미래를 개척하는 퓨처빌더(Future Builder)로 도약하겠다"고 했다. 미·중 패권 경쟁, 경기 침체, 중국발 공급 과잉 등 글로벌 리스크를 짚으며 사업 부문별 대응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사업 재편이 이뤄지는 조선과 건설기계 부문의 안착은 정 회장의 핵심 과제로 꼽힌다. '마스가' 프로젝트와 맞물린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의 합병의 경우 그룹의 미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주요 전략으로 평가된다.
HD현대는 조선업 부문의 합병을 기점으로 군함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낼 방침이다. 안보 불확실성으로 늘어나고 있는 군함 수요와 '마스가'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서다. 통합 HD현대중공업은 오는 12월 1일 공식 출범할 예정으로, 2035년까지 방산 부문 매출 10조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한 미국 기업과의 협력도 강화 중이다. HD현대는 지난 26일 경주에서 미국 최대 방산 조선사 헌팅턴 잉걸스와 '상선 및 군함 설계·건조 협력에 관한 합의각서(MOA)'를 체결했다. 미 해군의 차세대 군수지원함 개발 사업 입찰에 양사가 함께 참여하는 것으로, 성사될 경우 한국 조선사 중 처음으로 미 해군 함정을 건조하게 된다. '마스가' 프로젝트에도 더욱 힘이 실릴 것으로 기대된다.
정 회장의 위기관리 능력을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최근 중국 상무부가 한화오션의 미국 자회사 5곳을 제재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정치적 변수에 따른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미 조선 협력을 신성장 동력으로 삼기 위해선 기술력은 물론, 대내외 리스크에 대응할 역량도 필수적이라는 분석이다.
정 회장은 당분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네트워크 확장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존 펠란 미국 해군성 장관과 조선업 협력을 논의, 국내 조선업계 최초로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공식 면담을 가졌다. 빌 게이츠 테라파워 회장을 만나 소형모듈원자로(SMR) 사업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등 미국 주요 인사들과 접촉을 지속해서 확대하고 있다.
미국 현지 조선소 인수 여부에도 관심이 쏠린다. HD현대는 지난 8월 미국 사모펀드 서버러스캐피탈, 한국산업은행과 '한미 조선 산업 공동 투자 프로그램 조성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바 있다. 주요 투자 분야는 미국 조선소 인수 및 현대화, 첨단 조선기술 개발 등이다. 이날 미 조선소 인수 관련 질문에 정 회장은 "여러 가지 옵션을 두고 검토하고 있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