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왼쪽), 안와르 알 히즈아지 S-OIL 대표이사. /사진=뉴스1·에쓰오일(S-OIL)

대산 산단에서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이 NCC(나프타 분해 설비) 통폐합을 결정하며 이달 말 석화업계 자구안 제출 시한을 앞두고 물꼬를 텄지만 S-OIL(에쓰오일)이 샤힌 프로젝트 증산을 고수하면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여수 산단은 정부가 대산 1호 재편안에 대한 지원 규모 등을 살피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 울산 산단은 S-OIL이 사실상 정부 요구를 거부해 다른 기업의 희생을 강요하는 모양새다. 현지 대한유화·SK지오센트릭·S-OIL이 외부 컨설팅을 진행 중이지만 샤힌 프로젝트가 강행될 경우 대한유화와 SK지오센트릭만 설비를 닫아야 하는 상황이다.

1일 재계에 따르면 여수 산단은 일정 부분 GS칼텍스와 LG화학이 논의를 이어가고 있지만 울산 산단은 재편안 도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는 지난 8월 중국발 저가 공세로 인한 과잉 공급을 해소하기 위해 국내 석화업계에 에틸렌 270만~370만 톤 감산을 요청했다. 산업통상부는 감산량 산정 시 전체 생산 가능 물량에 샤힌 가동 예정 물량 180만 톤도 포함했다는 입장이지만 사실상 사우디아라비아 기업인 S-OIL은 정부 요구를 따르지 않고 있다. S-OIL 지분 63%를 보유한 최대주주 아람코 오버시 컴퍼니 B.V.는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 자회사다.


석화업계에서는 국내 3대 산단이 전체 감산 목표에 공동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대산 산단에서 최대 110만 톤 감산이 가능하고, 에틸렌 생산이 가장 많은 여수가 대산 수준 이상으로 참여하더라도 국내 석화업계가 공급 과잉에서 벗어나려면 울산에서만 약 100만 톤 감산이 필요하다. 울산에서는 대한유화 90만 톤·SK지오센트릭 66만 톤·S-OIL 18만 톤의 에틸렌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내년 샤힌 완공 시 S-OIL 생산능력은 198만 톤으로 급증한다. 아람코를 등에 업은 S-OIL이 증산 기조를 유지할 경우 대한유화와 SK지오센트릭은 설비 폐기 외에 선택지가 없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대한유화는 과잉 생산이 아니라 필요한 수요처에 맞춰 생산하고 있다"며 "회사가 잘하고 있는 사업을 접고 샤힌에서 물량을 받는 건 말이 안된다"고 말했다. SK지오센트릭은 컨설팅이 진행 중이라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나머지 기업만 시설을 닫는 방식으로 감산이 이뤄지면 울산 산단은 사실상 사우디 아람코가 주도하게 된다. 국내 에틸렌 패권 일부가 사우디로 넘어가는 셈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S-OIL은 샤힌 프로젝트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 자구안에 동참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샤힌이 따르지 않는다고 다른 기업이나 산단이 피해를 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샤힌을 중심으로 통폐합이 진행될 경우 국내 기업이 에틸렌 경쟁력을 확보하긴 어렵다고 우려한다. 샤힌에서 생산되는 에틸렌은 사우디 TC2C 기술을 적용해 원유에서 직접 추출하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이 높다. 사우디 원유가 낮은 가격으로 안정적으로 공급되면서 경쟁력을 잃은 국내 석화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발 저가 공세 유발한 '아람코'…국내 석화업계 어려움 키워

지난해 3월25일(현지 시각)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발전포럼(CDF)에 참석을 하고 있는 아민 나세르 아람코 CEO. /사진=뉴스1

S-OIL의 최대주주 아람코가 국내 석화업계를 어렵게 만든 중국발 저가 공세의 배후로 지목돼 부정적 여론도 커지고 있다. 중국은 2020년대 초 석화 시설을 대규모 증설하며 국내 석화업계의 공장 가동률을 떨어뜨렸고 생산을 늘릴수록 손실이 커지는 구조로 만들었다. 아람코는 같은 시기 중국 석화기업들에 막대한 투자를 이어갔다. 아람코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원유 공급처 확보가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샤힌 감산에 협조하지 않는 이유도 에틸렌 생산을 줄일 경우 원유 공급량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국내 석화업계 경쟁력 제고와 달리 샤힌은 사우디 원유와 TC2C 기술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


아람코는 중국 석화 산업의 최대 투자자 중 하나다. 지난해 아민 나세르 아람코 대표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개발포럼'에서 "중국은 우리의 글로벌 투자 전략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며 투자 확대 기조를 재확인했다. 실질적 투자도 꾸준했다. 2023년에는 중국 석화기업 '룽성석화' 지분 약 10%를 매입하며 약 4조6000억원을 투자했다. 중국과 함께 13조원 규모의 '라오닝성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이 프로젝트는 내년에 가동되며 하루 30만 배럴 규모의 정유 공장과 연간 165만톤의 에틸렌 생산이 예정돼 있다.

사우디는 현재 중국과 밀접하게 공조하고 있다. 석유 생산 위주의 업스트림에서 벗어나 다운스트림 중심으로 체질을 바꾸며 석화 산업 진출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사우디 원유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석화 생산에 적극적인 중국과 협력해 석화 단지를 세우고 안정적인 원유 공급처를 확보하는 것이 아람코 입장에서는 최선의 전략이다. 샤힌도 TC2C 기술을 실증하고 국내 에틸렌 시장 패권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다.

국내 석화업계는 사실상 아람코로 인해 내년에도 공급 과잉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샤힌 프로젝트는 에틸렌 180만톤을 저렴한 가격으로 쏟아낼 예정이고 비슷한 시기 중국 라오닝성 프로젝트도 가동돼 국내외 공급 과잉은 더욱 심화된다. 국내 석화기업이 내년에도 에틸렌 초과 공급에 직면할 경우 수년 내 문을 닫을 가능성이 커진다. NCC는 가동률이 80% 이상이어야 손익분기점을 넘기지만 현재 70%대로 공장을 돌릴 때마다 적자가 발생하고 있다. 라오닝성과 샤힌 프로젝트의 물량까지 겹치면 공급 과잉은 더 심해질 전망이다. 한때 '석화의 꽃'으로 불린 여천 NCC도 3년째 적자가 누적되면 폐업 위험이 커졌다. 체력이 약한 다른 기업들도 아람코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