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 겸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사진=뉴스1

정부가 민관 합동으로 2조4000억원을 국내 석유화학 산업에 투입해 2030년까지 글로벌 4강에 진입하겠다고 밝혀 주목된다. 정부가 요구한 시한까지 국내 석화기업들이 자구안을 제출하면서 석화 산업 재편이 본격화되고 있지만 에틸렌 감산이 이뤄져도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전환 속도를 높이지 않으면 공급 과잉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스페셜티 전환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와 운영비 부담을 키우는 전기요금부터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25일 석화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4위로 꼽히는 독일을 넘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에틸렌 감산 수준을 추가로 높이는 동시에 스페셜티 전환을 가로막는 연구개발(R&D) 관련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독일은 내수에 필요한 에틸렌 수요와 생산량이 일치하고 전체 생산 규모도 약 500만톤 수준으로 한국보다 범용 제품 비중이 작다. 독일 석유화학 산업에서 차지하는 스페셜티 생산 비중은 60%에 달한다. 한국이 석화 분야 글로벌 4강 도약을 위해선 범용 제품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스페셜티 비중을 확대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과 화학물질등록평가법(화평법) 등 관련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화평법은 유럽연합(EU)보다 규제가 까다롭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개정으로 일부 완화됐지만 글로벌 기준에 맞춰 국내 석화 기업들이 연구개발(R&D)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행 화평법은 연간 1톤 이상 모든 기존 화학물질에 대해 등록을 의무화하고 있다. EU 리치(REACH)법도 연간 1톤 이상을 기준으로 하지만 제조·수입 시에만 등록한다. 게다가 화평법 기준은 1톤으로 완화됐지만 산업안전보건법상 기준은 0.1톤에 머물러 있어 현장 혼선을 키우고 있다.

고가의 전기요금도 문제로 꼽힌다. 산업용 전기요금은 최근 5년 사이 두 배 가까이 오르며 기업들의 부담 키웠다. 올해 기준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kWh당 192원인 반면 중국은 127원·미국은 116원이다. 지난 2분기 국내 석화기업 매출원가의 5.11%를 전기요금이 차지했다. 낮은 전기요금과 국가 차원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 중국 등과 경쟁하기 위해선 전기요금 부담 완화가 필수다.
LG화학 대산 NCC공장/사진제공=LG화학

현재 자구안보다 에틸렌을 더 줄여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기초 유분 생산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이 막대한 자본을 동원하고 있어 한국이 경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우디는 저렴한 원유 공급이 가능하고 COTC 공법을 통해 원유에서 석유화학 제품을 직접 생산한다.


지난 8월 정부는 국내 에틸렌 생산 가능 물량을 1470만톤(샤힌 프로젝트 180만톤 포함)으로 산정했다. 반면 지난해 내수 소비는 861만톤에 그치면서 잉여 물량 상당 부분을 해외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2021년부터 올해까지 수출 물량은 117만5000톤에서 189만4000톤으로 61% 늘었지만 같은 기간 톤당 수출단가는 1021달러에서 784달러로 하락했다. 올해 들어서는 처음으로 800달러 선마저 무너졌다. 사실상 물량 확대를 통해 저가로 밀어내는 구조가 고착화됐다는 평가다. 370만톤을 감산하더라도 내수 소비를 웃도는 공급 구조는 이어진다.

다른 석화업계 관계자는 "이번 감산이 성공적이었고 국내 석화업계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라며 "현재 감산 수준에 머무르지 말고 추가 감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에틸렌 감산 국면이 일본에 비유하면 1990년대 수준에 불과하다고 본다. 중동과 중국의 저가 공세가 이어지자 일본은 일찍이 범용 제품을 줄이고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제품 비중을 늘렸다. 30년 넘게 늦게 석화 재편을 시작한 한국이 일본을 벤치마킹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시각이다. 글로벌 석화 3위인 일본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1지역·1기업'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 정부는 합작 법인 설립을 통해 설비를 통폐합하고 고효율 설비에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이를 위해 세제 혜택과 공정거래법 예외 적용도 병행했다. 중국의 범용제품 공세 속에서 몸집을 줄이는 대신 스페셜티 비중(50%)을 늘리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 소재 등 고난도 정밀화학 분야에서 높은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반도체 3대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에칭가스·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경우 세계 시장의 70~90%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