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엔저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지난달 평균 원·엔 환율은 100엔당 900원선 안팎에서 움직였다. 엔화의 가치가 지난해 같은 기간 1000원을 웃돌던 것에 비하면 10%가량 하락한 것이다. 


엔화가 폭락하자 수출기업들은 울상을 지었다. 글로벌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일본기업의 공세를 당해내기엔 힘이 부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엔화가치 폭락이 반가운 기업도 있다.

◆ 3분기까지 지속되는 엔저

적극적 통화완화정책으로 경기를 부양하고자 했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계획은 지난해 말 위기에 봉착했다. 시장에 돈을 계속 풀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경기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2013년 1분기 5.1%에 달했던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증가분은 지난해 2분기 -0.2%를 기록하며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3분기에도 하락폭이 확대돼 -1.2%의 역성장을 기록했다.

경기지표가 계속해서 부진한 성적을 보이자 지난해 말 아베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조기 총선거를 결정하는 초강수를 뒀다. 아베의 승부수는 적중했고 기존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 연합이 선거에서 압승하며 아베노믹스에 힘을 실어줬다.


 

[STOCK] ‘엔저’에 뜨는 종목

정책의 불확실성이 사라지자 박스권에 갇혀있던 엔화가치도 다시 하락세로 전환됐다. 중의원 선거 직전인 지난해 10월 달러당 110엔선을 밑돌던 엔·달러 환율이 선거 이후 120엔을 넘나드는 모습을 보인 것. 결국 지난달 28일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24.30엔을 기록하며 지난 2002년 12월 이후 1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 외환시장에서는 심리적 마지노선인 125엔선도 조만간 돌파할 것으로 내다본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엔화의 가치하락 속도에 대해 아직은 괜찮다는 입장을 밝힌 것도 통화완화가 꾸준히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에 탄력을 붙인 것으로 풀이된다. 스가 장관은 “주요 20개국(G20) 합의대로 급격한 환율변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다만 지금 엔화 환율이 급격한 변동을 보일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일본 내 경상수지가 개선되는 점을 감안하면 엔화가치의 하락세는 오는 3분기쯤 꺾일 것으로 전망했다. 또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이후 달러화가 일시적으로 횡보하거나 하락할 가능성이 대두되며 엔·달러 환율의 상승을 점쳤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미국과 일본이 통화정책 차별화를 보이는 점을 고려할 때 엔화의 추가 약세가 진행될 것”이라며 “본격적으로 미국의 금리인상 사이클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3분기 혹은 4분기 초에는 엔·달러 환율이 130엔 수준까지 상승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박 팀장은 “엔화의 급격한 약세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 엔 약세를 불평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며 “그 배경은 미국과 일본 간 밀월관계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소재용 하나대투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원·엔 환율의 하락원인을 원화 강세에서 찾았다. 소 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 저금리가 지속되고 위험자산 선호도가 커지며 신흥시장으로 해외 투자자금이 유입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주요 신흥국 통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고 한국 역시 글로벌 금융시장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STOCK] ‘엔저’에 뜨는 종목

◆ 엔화 부채비율 상위 종목 주목

엔저의 십자포화는 국내 기업의 수출경쟁력을 크게 악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이 지난달 11일부터 20일까지 국내 수출기업 307개를 대상으로 ‘최근 엔화 약세의 수출기업 영향’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기업의 70.3%가 현재의 원·엔 환율 수준에서 일본 제품과 경합을 벌일 때 경쟁력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응답했다.

특히 자동차산업은 엔저의 영향으로 극심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분석된다. 자동차산업연구소에 따르면 일본의 자동차기업 토요타는 올 1분기 전세계에서 252만대의 차를 팔아 2위 폭스바겐을 3만대 차이로 따돌리며 1위에 올랐다. 반면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2% 감소한 193만대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 현대차의 주가도 하락 곡선을 그리며 SK하이닉스에게 시가총액 순위 2위 자리를 내줬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엔저의 영향이 올해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현대·기아차의 수익성도 개선되기 힘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선업계도 엔저의 사정권을 피할 수 없었다. 지난 1월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은 일본 조선사들에게 월간 선박 수주량에서 밀렸다. 주가 역시 연초 대비 20% 이상 하락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엔화가치가 폭락함에 따라 중국 관련 수혜주인 면세점업종이나 화장품업종도 위험에 직면했다. 지난달 28일 기준 엔·위안 환율은 지난 2012년 말보다 40%가량 상승했지만 원·위안 환율은 1% 상승에 불과했다. 중국인관광객이 한국보다 일본을 선호하는 이유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팀장은 “중국의 소득수준 향상에 따라 관광수요가 점차 다변화될 수밖에 없다”며 “최근의 원·엔 환율 흐름은 중국인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중요한 변수”라고 설명했다.

기업들이 엔저로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 여행업종은 남몰래 웃음 지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일본으로 여행가는 관광객이 늘어난 데 힘입어 지난 3월 해외여행객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3%가량 증가한 141만6683명을 기록했다. 일본을 관광하는 국적별 외국인 수도 지난 2003년 이후 한국인이 가장 많았다.

노아람 KDB대우증권 애널리스트는 “엔화 약세에 따른 일본으로의 관광이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여행 관련주 중에서는 하나투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엔화로 부채를 짊어진 종목들도 엔저가 부채규모를 감소시켜 기업가치가 향상되는 수혜를 입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코스피시장에서는 대한항공, 포스코, SK하이닉스, 코오롱 등 18개 기업이 엔화부채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삼익THK는 외화부채 중 엔화 비중이 100%로 집계돼 엔저 시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8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