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등장한 ‘X세대’가 지금은 ‘낀 세대’ 김 부장으로 대한민국 중심에 서 있다. 유래 없는 ‘신인류’로 불렸지만 베이비붐·밀레니얼 세대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낀 세대’로 낙인찍힌 그들. 직장에선 ‘말 잘 듣는’ 부하직원이자 ‘꼰대 강박증’에 시달리며 집에 가도 아내와 아이들이 불편해 한다. 한해 1000명이 넘는 ‘김 부장’이 자살하고 젊은 날을 바친 직장을 떠난다. 누가 그들을 궁지로 내몰았을까. 무엇이 그들을 버티고 힘내게 하는 걸까. <머니S>가 ‘김 부장’의 하루를 통해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살펴봤다. <편집자주>

[72년생 김부장] ③그녀가 조직에서 사는 법



#1. 국내 재계서열 10위권의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는 워킹맘 김지영씨(가명·48). 스물셋에 공채로 입사해 8년을 일하다 아이를 낳고 두달간 출산휴가를 다녀왔을 때 상사들의 반응은 아직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여자를 데려다 뭐에 써요.”
“다른 부서로 보내주세요.”

“저는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로 버티고 성과도 인정받다보니 어느덧 부장이 돼 남편보다 높은 연봉을 받으며 임원을 넘보는 위치까지 올랐다. 남자후배가 승진하는 걸 지켜보고 3명의 여자동기가 결혼과 출산을 이유로 회사를 떠나는 과정을 견뎌낸 결과다.


“그때는 여자가 아이 낳고 회사 나와 일하면 억척스럽고 부끄럽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겠지만 그랬어요.”

#2. “너랑 자고 싶다.” 정지은씨(가명·44)는 지난 16년 광고·홍보업계에서 5개의 회사를 거치며 지금은 꽤 큰 중견기업의 본부장이 됐다. 그가 첫직장을 그만둔 이유는 상사의 성차별적인 말과 성희롱,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해서다. 해외연수와 정부기관 등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으며 지금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지만 수년 전 그 일은 직장생활 최대 위기였다.

평일 업무시간 사무실 안, 고객과 낮술을 마시고 들어온 남자동료는 그에게 성희롱을 했다. 그런데 이후 사내에는 반대로 그가 남자동료에게 “너랑 자고 싶다”는 말을 한 것으로 거짓소문이 퍼졌다. 해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소문을 퍼뜨린 동료들을 역추적해서야 범인이 당초 문제를 일으켰던 남자사원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진=머니S DB
/사진=머니S DB

◆그녀가 조직에서 사는 법
1997년 외환위기와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보내며 회사의 운명과 재기를 함께했지만 ‘72년생 여성부장’들의 존재감은 늘 조직이나 동료들 사이에서 배제됐다.

“중요한 얘기는 일 끝난 후 저녁 술자리나 담배 피우는 자리에서 나온다”, “골프는 언제 배우냐”, “여자들은 일 참 쉽게 한다” 등의 말을 들을 때 이들은 ‘정말 내가 회사에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닐까’라는 고민을 끊임없이 했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고 ‘미투’(Me too) 운동이 확산돼 누구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대놓고 무시하거나 성폭력을 저지를 수 없다. 하지만 여성부장들은 새로운 고민을 마주한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남성과 대등해진 사회에서 후배들의 롤모델이 돼야 한다는 부담감이다.

“부장님이 나가시면 저희는 희망이 없어요.”

김 부장은 한때 끝까지 살아남아 임원으로 승진하는 게 목표였다. 지금은 아니다. 어느 조직이든 각자가 맡은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며 무엇보다 임원이 돼 개인생활을 희생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자기만 바라보는 후배들이 ‘여자는 결국 여기까지구나’라고 생각할까봐 미안하다.

정 본부장은 업무상 대외적으로 많은 고객을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도 만나야 하는 문제로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술자리나 주말 골프에 억지로 껴야하는 게 싫어서 거짓말도 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즐기려고 골프를 배웠지만 비즈니스미팅을 강요받을까봐 못하는 척 연기했어요. 지금도 제가 골프를 잘 치는 줄 아는 사람은 거래처에서 가장 친한 직원 한명뿐이에요.”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여자라서 얻는 이점 이용하라”
김 부장과 정 본부장 두사람 다 ‘세대의 변화’를 느낀다고 했다. 고성장시대 여성의 사회진출이 거의 없던 선배세대와 워라밸의 가치를 중시하는 후배세대의 중간에 낀 이들은 머지않아 다가올 은퇴를 준비해야 한다.

“이제는 우리에게 ‘남자처럼 일하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여자라서 잘할 수 있는 일, 이를테면 팀원이나 클라이언트와의 정서적 교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업무에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죠. 남자들의 세계를 들여다봐도 힘든 점이 많아요. 사내정치 하고 싶은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어요. 여자후배에게 ‘여자라서 얻는 이점을 이용하라’고 조언해주고 싶어요. 같은 성과를 내도 여자가 하면 더 잘했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거든요.”

정 본부장은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인생2막이 있다. 철야근무가 일상이다 보니 자연스레 ‘비혼’의 삶을 살게 됐고 경제적 여유가 생긴 만큼 보다 사회발전이나 복지에 기여하는 NGO 활동 등을 하는 게 꿈이다.

그는 “결혼은 늦더라도 마음 맞는 사람이 있으면 할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이 들어 아름다운 삶’은 경제적 성공을 이뤘을 때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7년 성별 대학진학률은 여성 72.7%, 남성 65.3%로 7%포인트 넘게 벌어졌다. 미국은 이런 현상이 훨씬 일찍이 나타났다. 미국의 대졸 여성이 남성보다 많아진 건 1982년부터다. 지난해 학위취득자 중 여성은 학사 57.3%, 석사 58.8%, 박사 52.9%를 차지했다. 그러나 S&P500 기업 중 여성 최고경영자(CEO)는 5%에 불과하다. 그 많던 똑똑한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본 기사는 <머니S> 제587호(2019년 4월9~1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