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운전면허증 뒤에 1만원짜리 지폐 한장을 접어 붙여뒀다가 교통경찰에게 걸리면 돈이 붙은 운전면허증을 건네주는 것이다. 이때 경찰은 운전면허증을 받아 확인해보는 척하면서 자연스레 돈을 챙겼다.
미국 교통경찰도 한인 때문에 변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다만 직접 돈을 받지 않고 한국인 운전자가 슬쩍 돈을 땅에 떨어뜨리면 경찰이 주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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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원권 100장 넣은 편지봉투
한국사회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일반인이 사소하게 검은돈을 주고받는 경우는 많이 줄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크게 개입되는 곳에서는 아직도 뿌리째 사라지지 않았다. 떳떳하지 못한 돈을 줄 때 가장 일반적으로는 봉투를 사용한다.
작고 길쭉한 일반 편지봉투에는 1만원짜리 지폐가 100개(100만원)까지 들어간다. 5만원권 지폐로 넣으면 500만원이 들어가는 셈이다. 보다 큰 서류봉투에는 돈을 차곡차곡 넣은 후 테이프로 고정하면 편지봉투에 비해 10배 가까이 많은 돈을 담을 수 있다.
상자를 이용하는 사례도 많다. 지난 1962년에는 세무공무원이 각종 세납을 봐주는 조건으로 돈이 담긴 과자상자를 받았다가 검거된 적이 있다. 80~90년대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엔 검은돈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선물처럼 보이는 상자에 돈을 담아 건네는 방식이 확산됐다.
지난 93년에는 해군 인사비리사건이 발생했는데 수사결과 해군장교 부인들이 케이크 상자 안에 1억원에 달하는 수표와 차명계좌의 통장 및 도장을 넣어 참모총장 부인에게 전달한 사실이 드러났다.
수서비리사건(1996년)도 유명하다. 당시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100억여원의 돈을 정관계 인사들에게 뿌렸는데 각각 1억2000만원, 2억4000만원을 각각 넣은 라면상자와 사과상자를 이용했다.
한국마사회 비리사건(2005년)의 경우 안동 간고등어상자, 상주 곶감 상자, 초밥 도시락통이 동원됐고 부산 건설업자의 정관계 로비사건(2007년)에서는 이탈리아 명품브랜드의 넥타이 쇼핑백이 자금전달에 사용됐다.
지난 2012년 홍사덕 전 국회의원이 지인인 사업가로부터 받은 불법정치자금 3000만원은 소고기선물용 택배상자와 중국산 녹각상자에 들어있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은 건설업자로부터 현금 5000만원과 미화 1만달러가 담긴 와인상자를 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2개월을 선고받았다. 그 외 양주상자, 와이셔츠상자, 복사용지상자 등 각종 상자가 검은돈 전달수단으로 등장했다.
금융실명제(1993년)가 시행된 후로 추적하기 쉬운 수표는 잘 사용되지 않고 현금만 검은돈으로 전달됐다. 거액의 현찰일수록 일반상자에 담으면 무거워서 밑이 빠지기 쉬운 만큼 튼튼하면서도 큼직한 사과상자를 선호했다. 가로, 세로, 높이가 51x36x27cm인 사과상자는 1만원권 지폐가 2억4000만원어치 담기는데 25kg의 무게도 잘 견딘다. 1996년에는 한 재벌총수 집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61억원이 담긴 사과상자 25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지난 2002년에는 모재벌이 40여개의 사과상자에 150억원을 담아 트럭에 실은 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트럭째 바로 넘기는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전달해 ‘차떼기’라는 용어가 생겼다. 이후로 사과상자는 사용하기 부담스러울 정도가 됐다.
◆5만원권 발행 후 작아진 상자
5만원권이 발행(2009년)된 이후부터는 돈을 옮기는 상자의 크기가 건강음료상자 사이즈로 작아졌다. 올 상반기 정가를 뜨겁게 달군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대표적이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2013년 이완구 전 국무총리의 선거사무소를 방문하면서 ‘비타500’ 상자에 3000만원을 넣어 전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로 인해 해당 음료의 판매량이 하루 새 42%나 늘고 판매회사인 광동제약의 주가가 일시적으로 크게 오르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그러나 이후 검찰수사 결과 발표(7월2일) 때는 비타500 박스가 아니라 100개들이 커피믹스 상자와 비슷한 크기의 작은 상자에 돈을 담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결과 발표 후 이 전 총리가 결백하다고 호소해 앞으로 법정공방이 예상된다.
이 사건을 통해 비타500과 같은 작은 건강음료상자에는 5만원권을 사용할 경우 현금 7000만∼8000만원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로봇청소기로 유명한 중견 가전업체 모뉴엘의 회사 대표는 한국무역보험공사, 수출입은행 간부 등에게 돈을 줄 때 티슈 상자를 이용했다. 5만원권이 최대 1억원까지 들어가는 티슈상자에 3000만~5000만원을 넣은 뒤 빈 공간은 휴지로 채워 상자째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지폐 대신 무기명 선불카드(prepaid card)를 줄 때는 담뱃갑에 50만원권 카드를 10~20장 넣어 500만~1000만원씩 건넸다. 수백만원짜리 선불카드로 억대의 검은돈이 무역보험공사 사장에게 흘러 들어가면서 모뉴엘에 대한 보험·보증한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무역보험공사가 떠안게 된 모뉴엘의 빚은 수천억원에 이르렀다.
선불카드는 사용대금을 미리 내고 물품을 살 수 있는 카드로 공중전화카드와 지하철 정액권도 소액의 소박한 선불카드다. 무기명으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금액이 큰 선불카드는 담뱃갑처럼 작은 것에 넣어 건네기 용이하다.
가방도 상당한 금액의 검은돈을 옮기는 수단으로 애용됐다. 1993년 슬롯머신 대부가 박철언 전 의원에게 5억원어치 수표와 현금이 든 007가방을 넘겨준 사건처럼 가방 중에서도 특히 007가방이 검은돈을 담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알려져왔다. 007가방에는 1만원권 1만장(1억원)이 들어가고 5만원권은 5억원, 100달러 지폐로는 10억원이 넘는 돈을 넣을 수 있다. 하지만 007가방은 수상하게 보이기 쉬워 요즘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골프가방이 등장했다. 진승현 게이트(2001년)에서는 뇌물이 담긴 골프가방을 호텔 주차장에서 승용차 트렁크에 옮겨 싣는 방법이 사용됐다. 골프장에서 실제로 라운딩하면서 캐디백을 건네기도 한다. 일반캐디백에는 골프채를 넣은 상태에서 1억~2억원이 넘는 돈도 넣을 수 있다.
골프채가 없을 경우 50억원 이상 넣을 수 있지만 골프채가 들어있는 상태에서 바닥과 클럽 사이에 돈을 넣어도 자연스럽게 상당한 금액을 넘길 수 있다.
국세청 대선자금 불법모금(1999년) 시에는 여행용가방과 이불보자기, 세풍사건(1999년)에서는 캐리어가 동원됐다. 정태수 전 한보 회장의 경우 5000만원 이하는 007가방에, 5000만~1억원은 골프가방에 넣어 로비자금을 전달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9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