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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길.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
정동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건너편에는 백주년기념관이 있고 왼쪽에는 주차장 출입구가 있다. 그 길가의 작은 표지석에는 “손탁호텔 터. 한말 1885년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를 따라 러시아에서 온 손탁(A. Sontag, 1854~1925)이 호텔을 건립. 내·외국인의 사교장으로 쓰던 곳”이라고 쓰여 있다.
손탁호텔은 1902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커피숍이 입점한 곳이다. 이곳에는 저명한 해외인사들이 유숙했는데 종군기자로 내한한 영국의 전 수상 윈스턴 처칠, <허클베리핀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다녀가기도 했다.
손탁(한국명 孫鐸)은 독일국적의 여성으로 러시아에서 살다가 한국 땅에 들어왔다.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처형(妻兄)이었던 그는 아관파천 당시 고종을 도왔다. 이에 고종이 땅을 하사했고 그 자리에 양옥을 지은 게 호텔의 시작이다. 하지만 1909년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자 한국을 떠났다.
이후 이 자리는 1917년 이화학당이 구입해 1975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 기숙사로 썼다. 1923년 9월 학당의 세번째 건물인 프라이홀이 준공됐는데 총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 교실 10개, 교사의 숙소와 함께 수도, 전기, 스팀난방시설을 갖춘 최신식건물이었다.
손탁호텔 터 표지석에서 왼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에 이화여고본관 건물이 보이고 여기를 지나면 곧 유관순열사가 빨래했던 ‘유관순 우물터’가 나온다. 열사는 나이와 시대를 뛰어넘어 ‘순수한 열정’에 ‘불굴의 의지’가 담긴다는 표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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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호텔 터 표지석.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
◆돌고 도는 정동길
이화여고 동문을 나와 창덕여중으로 가는 길가 담장 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었던 ‘보구여관’(保救女館)의 표지석이 있다. 보구여관은 1887년 미국 북감리회의 재정지원으로 설립됐다.
설립자는 하워드라는 여의사였다. 보구여관이란 이름은 고종이 하사한 것인데 이 병원에서는 여성의사와 간호사를 다수 양성했다. 동대문성곽공원 터에 있던 볼드윈진료소와 합쳐서 1912년 해리스 기념병원이 됐고 나중에 이화여대의 의료원이 됐다.
이화여고 서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농협중앙회와 이화여자외고 사이 골목길로 들어서게 되고 그 끝에서 창덕여중 서북쪽 담장과 마주친다. 창덕여중 운동장을 가로질러 서북쪽 뒷문으로 나와도 같은 장소에서 담장 밑에 깔린 성돌 유구를 발견할 수 있다. 네모반듯한 형태로 보아 숙종 때 쌓은 성곽으로 추정된다. 담장 옆 골목길은 정동과 충정로 1가의 법정동 경계를 따라 50m 정도 이어지므로 이 담장을 따라 성곽이 지나갔을 거라 예상된다.
창덕여중 담장을 따라가면 성곽은 ‘어반가든’이라는 레스토랑건물에서 막힌다. 원래는 한성교회 담장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화교 교회인 한성교회 담장이 된 성곽의 유구를 보려면 문화일보 옆길로 나와 새문안길을 따라 다시 정동길로 들어가야 한다. 한성교회와 어반가든의 경계를 이루는 구석진 담장 밑에서 두세줄의 성돌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서는 큰 아까시나무가 시야를 가린다. 원점을 돌고 도는 정동길이다.
창덕여중 뒷담 밑에 깔려 있는 성돌 유구를 보고 문화일보 주차장 왼편으로 내려오면 현재 청춘극장으로 활용되는 문화일보 홀이 나온다. 개화기에 동양극장이 있던 자리다. 문화일보 앞 보도 가장자리에는 ‘동양극장 터’라는 표지석이 있고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동양극장은 1935년 서울에 세운 최초의 연극전용극장으로 신파극을 공연했다. 이 극장은 당시 대중연극의 중심지가 됐으며 ‘호화선’과 ‘청춘좌’는 이 극장을 대표하는 2대 극단이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연극이 공연될 때는 장안의 많은 기생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운영난으로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 완전 폐관됐고 1995년 철거됐다.”
◆프랑스와 창덕여중 터
창덕여중 자리는 개화기에 프랑스공사관이 있던 곳이다. 조선과 프랑스가 1886년 수교했을 당시에는 현재의 종로구 관수동에 공사관이 있었다. 그리고 3년 후 지금의 정동으로 이전했다. 옛 사진을 보면 공사관은 바로크식 2층짜리 건물에 5층 높이의 탑옥(塔屋)이 설치돼 있었다. 탑옥은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慶運宮·지금의 덕수궁)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돼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상실되면서 프랑스공사는 철수했고 공사의 지위는 영사로 격하됐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프랑스공사관은 현재의 프랑스대사관이 있는 서대문 합동으로 이전했다. 그 후 프랑스공사관은 총독부 소유로 조선교육회, 구매조합, 수양단조선지부 등으로 쓰이다가 1935년 서대문소학교가 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건물이 교정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헐렸다. 학생 수 감소로 1973년 2월 서대문국민학교가 폐교된 후 1973년 3월 재동에 있던 창덕여중이 이전해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