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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AI 가상비서는 챗봇과 스피커를 포함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사진은 SK텔레콤의 AI 스피커 '누구 캔들'. /사진제공=SK텔레콤 |
#. 최근 서울 동대문의 한 호텔을 방문한 B씨는 제공 물품에 칫솔이 포함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 외부로 사러 나가기엔 너무 늦은 새벽 2시. 객실 내 인공지능 가상비서를 통해 칫솔을 주문했다. 이윽고 방을 찾아온 건 사람이 아닌 로봇이었다. 로봇은 칫솔을 배송하고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유유히 떠났다.
“시리(Siri)야.” 사람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간단한 명령까지 수행하는 인공지능(AI) 가상비서에 신기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떨어지는 음성인식 정확도와 낮은 이해도로 직관적 명령밖에 수행하지 못해 사람들은 등을 돌렸다. 10여년이 흐른 지금 AI 가상비서는 알게 모르게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딥러닝 기술을 기반으로 능력이 크게 향상하면서다.
“고양이와 개, 이젠 구별합니다” 딥러닝이 이끈 AI 가상비서 시장 ‘사상 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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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는 지난해 AI 기술로 음성을 녹음하면 텍스트로 변환해주는 새로운 음성기록 서비스 '클로바노트'를 출시했다. /사진제공=네이버 |
AI 가상비서는 사용자의 언어를 듣고 의도를 파악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든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총칭한다. 날씨·교통상황 등 간단한 질의응답은 물론 최근엔 사용자의 패턴을 분석해 적절한 서비스를 추천하기도 한다. AI 가상비서가 탑재된 음원 플랫폼에서 ‘OO 음악 찾아줘’라고 명령하면 단순히 해당 과제만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 이용자가 좋아할 만한 음악을 함께 추천해 제공하는 식이다.
AI 가상비서의 역할이 확장됨에 따라 관련 기기 시장의 규모 역시 매해 커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2021년 1분기 AI 기반 스마트 스피커와 디스플레이의 전 세계 출하량은 사상 최대치인 4000만대를 기록했다.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관련 기기 수도 올해 말까지 50억대를 훌쩍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딥러닝 기술의 발전이 가상비서 시장 성장을 뒷받침했다고 입을 모은다. 민옥기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본부장은 “사람의 언어로 소통한다는 특성상 음성인식 기술은 매우 중요하다”며 “딥러닝 기술 적용으로 음성인식의 정확도가 크게 향상된 게 가장 큰 변화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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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의 음성인식 컨트롤러 미니링크. /사진제공=카카오 |
딥러닝은 AI 가상비서를 학습시키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과거 가상비서에 ‘강아지’를 학습시키기 위해선 “털이 있고 네 발 달린 동물”이라는 강아지의 특징을 하나하나 입력해야 했다. 반면 딥러닝 기술이 적용된 뒤엔 여러 장의 사진을 보여주면 인공신경망을 통해 사진들 속에서 공통 패턴을 스스로 찾아 강아지와 고양이를 구별한다.
장병탁 서울대 AI연구원 원장은 “이전까진 매 상황 어떻게 대답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일일이 코딩을 해줘야 해 다양한 상황을 다루기 쉽지 않았다”며 “지금은 입력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AI가 스스로 학습해 자신을 발전시킨다”고 설명했다.
딥러닝의 적용으로 대화의 상황과 맥락에 기반해 사용자 의도를 파악하는 자연어처리(NLP) 기술도 크게 성장했다. 이전 대화 내용을 기억해 사용자 선호도를 학습하며 보다 정확한 개인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SK텔레콤의 인공지능 가상비서 ‘누구’(NUGU)가 탑재된 지도서비스 ‘티맵’에서 “오늘 마트 영업해?”와 같이 영업정보를 물어볼 때 단순히 ‘예’ ‘아니오’로 답하는 게 아니라 현재 영업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마트를 알려주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소파에 앉아 엘리베이터 호출… ‘스마트 허브’ 플랫폼으로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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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AI 가상비서는 챗봇과 스피커를 포함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사진은 SK텔레콤의 AI '누구'가 탑재된 기기 및 서비스 목록. /사진제공=SK텔레콤 |
오늘날 AI 가상비서는 챗봇과 스피커를 포함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최근엔 기기를 넘어 지도와 번역기 등 소프트웨어 서비스에도 탑재된다. 휴대폰에 빗댄다면 AI 가상비서는 iOS나 안드로이드 등 하나의 운영체제인 셈이다.
국내 IT기업도 여러 파트너사와 협력해 가상비서 서비스 기반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가상비서가 각종 IoT 기기와 자동차 등을 연결하는 스마트 허브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집에서 말 한마디로 TV나 에어컨 등 내부 기기와 외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끄는 제어가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민옥기 본부장은 “카카오톡도 처음에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도구에 불과했지만 이젠 물건도 사고 은행업무도 보는 등 다양한 기능들이 추가됐다”며 “AI 가상비서가 플랫폼으로 확장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게 된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일각에선 가상비서 기반 스마트 허브를 조성하고 있다. KT는 현재 98개 건설사 및 8개 홈네트워크사와 협력해 누적 600여개 단지, 50만여 세대에 아파트에 설치할 AI 서비스를 수주했다. 기가지니 아파트에서는 음성 및 스마트폰 앱을 통해 조명과 냉·난방 등 연결된 IoT 기기를 제어할 수 있고 엘리베이터를 호출할 수도 있다.
균형 맞추기 노력 필요… 데이터 격차 해소 순기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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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텔레콤의 '누구 케어콜'서비스는 AI가 코로나19 자가격리자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를 체크하는 서비스다. /사진제공=SK텔레콤 |
하지만 AI 가상비서로 수집된 개인정보가 유출될 위험도 여전히 공존한다. 최근 촉발된 ‘이루다 사태’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관계자는 “사용자 동의 없이 수집된 개인정보가 유출되면 큰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유럽의 GDPR(일반개인정보보호법)처럼 음성 부분에 있어 비식별 조치나 데이터 보관에 대한 보호 조치 등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AI 가상비서의 객관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균형 있는 데이터 수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를테면 특정 정당이나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데이터만 입력될 경우 정치적 성향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민옥기 본부장은 “통상 확보된 데이터는 기업 차원에서 미리 스캔해 개인정보 등 문제 소지를 정제한다”면서도 “정제된 이후에도 수집한 데이터가 한쪽으로 치우칠 경우 혐오·차별 등 편향된 발언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데이터를 균형있게 수집하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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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AI 호텔 로봇은 KT 융합기술원에서 자체 기술로 개발한 공간맵핑 기술, 자율주행 기술 등 최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이 적용돼 객실까지 자율주행으로 이동할 수 있다. /사진제공=KT |
문정욱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지능정보사회정책센터장은 “(시중의 AI 가상비서는) 대부분 음성 기반이라 디지털 취약계층의 접근 및 활용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독거 노인에게 말벗이 되어줄뿐더러 위급 상황을 파악하고 신고해주는 유용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SK텔레콤의 스마트 스피커 ‘누구 오팔’(NUGU opal)은 “구해줘” 또는 “살려줘”라고 외치면 사용자와 24시간 돌봄 서비스를 연결해준다.
입력방식이 음성을 넘어 다양해지면 이 같은 디지털 격차는 더욱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민옥기 본부장은 “음성만으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며 “미래의 가상비서는 다중감각(multimodal)을 활용해 주변 상황을 다양한 방법으로 파악하고 인지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