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전봉준을 필두로 한 동학농민군은 1년이 넘도록 조선의 불안정한 경제, 수탈, 외세의 조약 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사진은 체포 후 부하를 바라보는 전봉준의 모습. /사진=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1894년 전봉준을 필두로 한 동학농민군은 1년이 넘도록 조선의 불안정한 경제, 수탈, 외세의 조약 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사진은 체포 후 부하를 바라보는 전봉준의 모습. /사진=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1894년 2월15일. 1000여명의 농민군이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각종 무기를 지닌 채 관아로 향했다.

19세기 말 조선은 각종 외세의 불평등한 조약과 경제적 침투 등으로 악재가 겹치는 상황이었다. 탐관오리들은 백성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고 툭하면 물자와 곡식을 약탈하며 세금을 올리기 바빴다.


1893년 고부(현 전북 정읍)에 신임군수로 조병갑이 취임했다. 조병갑은 뇌물로 고부군수 자리를 얻어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당시 전북은 곡창지대였으며 고부는 핵심 지대에 속했다. 이에 전라도민들은 지속적인 수탈의 대상이 됐고 가혹한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조병갑은 수탈과 관련해 항의하러 온 백성들을 되레 곤장으로 매질했는데 이들 중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도 있었다. 전창혁이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사망하자 분노한 전봉준은 봉기를 일으키기 위해 농민을 불러 모았다. 그는 동학교도들에게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고 전주영을 함락시키자는 사발통문을 보냈다.

'녹두장군' 전봉준, 기세 몰아 전주성까지 점령

조선의 안핵사 이용태가 봉기를 반란으로 규정하면서 1894년 4월4일 농민들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사진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관아 습격을 계획하며 작성된 사발통문. /사진=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조선의 안핵사 이용태가 봉기를 반란으로 규정하면서 1894년 4월4일 농민들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사진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관아 습격을 계획하며 작성된 사발통문. /사진=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봉준은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고부의 접주였다. 1894년 2월15일 전봉준은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관아를 습격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고부민란'이다. 습격 당시 조병갑은 이미 전주로 도망간 상황이었다. 이에 농민군은 불법으로 빼앗긴 세곡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줬다.


소식을 들은 조정은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핵사 이용태를 보냈다. 이용태는 동학농민군을 위로하고 탐관오리 처벌을 약속했지만 이는 농민군 해산을 노린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용태는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리며 악랄한 행동을 자행했다.

이에 4월4일 분노한 1만여명의 동학농민군이 부안을 점령했고 황토현에서 영군을 대파한 데 이어 4월27일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전주성은 호남 지방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고종과 민비는 위기감을 느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한다. 6월8일 청국군은 충남 아산만에 상륙했고 다음날 일본군까지 톈진조약을 명분으로 제물포(현 인천)에 도착했다.

외세가 개입한 것을 우려한 동학농민군은 전주에서 조선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었다.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노비 문서를 불태우는 등을 조건으로 봉기를 멈추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관군의 회의에도 청일 국군은 조선 내에서 철수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 약탈에만 힘썼다. 일본군은 상륙 한 달 후 경복궁을 침입해 흥선대원군을 내쫓았다.

평등에 기초해 존중 원했던 농민들… 외세 개입에 무너져

20만명이 넘는 동학농민군이 일본에 맞섰지만 근대화가 진행돼 신식 무기를 지닌 일본군을 상대로 패배하면서 500명 남짓한 농민군만 살아남았다. 사진은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 /사진=문화재청
20만명이 넘는 동학농민군이 일본에 맞섰지만 근대화가 진행돼 신식 무기를 지닌 일본군을 상대로 패배하면서 500명 남짓한 농민군만 살아남았다. 사진은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 /사진=문화재청

일본의 내정간섭이 도를 넘자 20만명이 넘는 동학농민군은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봉기를 재기했다. 농민군은 11월20일부터 23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크게 패했다. 이후 세성산 전투에서도 패배한 후 재정비한 농민군은 12월5일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당시 근대화가 진행돼 신식 무기를 지닌 일본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 패배 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게 진압됐다. 전봉준은 500명 남짓한 농민을 제외하고 모두 진압되자 금구·원평을 거쳐 정읍과 순창으로 피신했지만 부하의 밀고로 12월2일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재판을 통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었다. 신분제 타파를 외치던 농민들은 수탈에서 벗어나 존중받는 사회를 원했다. 하지만 청·일이 개입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농민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지난 2004년 정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한 후 황토현 전투가 발발한 5월11일(음력 4월7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지난해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 조정과 동학농민군, 농민군의 진압에 참여한 민간인, 일본공사관 등이 생산한 자료 총 185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