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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정부가 H-1B(전문직 취업 비자) 비자를 앞세워 '자국 챙기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H-1B 비자 남용 실태 조사에 착수한 데 이어 발급 비용을 기본보다 100배 인상하기로 한 것이다. 조지아 구금 사태 이후 비자 제도 개선에 힘썼던 우리 정부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미국 현지 투자를 확대해 온 국내 기업들의 투자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단 우려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H-1B 비자 프로그램을 남용한 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할 방침이다. 기업들이 H-1B 제도 취지에 맞지 않게 저숙련 외국인을 고용, 인건비 절감에 악용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노동부는 지난 22일(현지시간) "고숙련 일자리는 미국인 우선이어야 한다"며 "우리는 H-1B 남용을 종식하고 고용주가 채용 과정에서 미국인을 우선시하도록 '프로젝트 파이어월'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인 일자리 보호를 위해 마련된 프로젝트로, 조사 결과에 따라 기업들은 각종 제재를 당할 수 있고 일정 기간 H-1B 프로그램 이용이 금지될 가능성도 있다.
H-1B 비자 수수료를 대폭 인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자국민 고용 확대를 취지로 H-1B 비자 수수료를 10만달러(약 1억4000만원)로 올리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1인당 1000달러(약 140만원)에서 100배 인상한 것이다. 이번 조치는 기존 비자 소지자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내년 2월 비자 신규 추첨 이후 신청자부터 대상이 된다.
트럼프 정부의 갑작스러운 비자 단속과 수수료 인상에 글로벌 기업들 당황하고 있다. H-1B 비자는 미국 빅테크(대형 IT 회사) 기업의 인재 채용에 활용돼왔다. 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MS)·구글·애플·메타 등의 회사가 해당 비자를 활용해 인도 등지에서 이공계 인력을 대가 고용한 바 있다. 론 히라 하워드대 정치학 교수도 이와 관련해 "H-1B 제도가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정부가 기업들의 남용 여부를 단속·집행한 적은 없다"고 했다.
비자 규제가 강화되면서 미국 내에서 역량을 키워온 국내 기업들의 고민도 커진다. 현재 H-1B 비자로 근무하는 노동자 대부분이 인도 출신이지만 비자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진다는 점에서 안심할 수 없단 관측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연구개발 조직 '삼성리서치 아메리카'(SRA)를 뒀고 LG전자는 4곳(LA·시카고·애틀랜타·뉴저지)에서 비즈니스 이노베이션 센터(BIC)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도 미국 현지에 생산 기반을 확보한 상태다.
조지아주 한국인 구금사태 이후 논의 중인 비자 제도 개선이 더뎌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대미 투자 기업의 비자 문제가 다뤄질 '한미 비자 워킹그룹' 출범을 앞두고 있긴 하지만, 상황을 신중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진단이다.
트럼프 정부의 모순적인 행보를 비난하는 시각도 있다. 대규모 대미 투자를 요구하면서 비자 장벽을 높이는 건 이율배반적이라는 지적이다. 현재 한국과 미국은 3500억달러(486조원) 규모 대미 투자안을 놓고 협상을 진행 중이다. 해당 과정에서 미국이 투자액의 직접 투자 비율 확대하라고 요구하면서 양국의 의견차가 나타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통화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3500억 달러 전액을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 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