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치매 환자 명의의 '잠자는 돈'이 한국 사회의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본인도 가족도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없는 돈, 이른바 '치매머니'가 국내에서만 170조원을 넘어섰다. 정부는 공공기관이 대신 자산을 관리하는 '공공신탁' 제도를 추진하고 있지만 가족의 반발, 고령층의 거부감 등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다. 고령화 속도에 비해 자산 보호 장치가 미비하다는 지적이 커지는 가운데 일본·스위스 등 해외의 선진 사례도 주목받고 있다.
주형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 9월30일 머니S가 주관하는 '제1회 시대포럼'에 참석해 "치매 환자가 2050년에는 400만명에 달하고 치매머니는 500조원에 이를 것"이라며 "이 자산이 의료·돌봄 재원으로 쓰일 수 있도록 후견·신탁제도, 금융권과의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치매머니란 치매로 인해 의사결정 능력을 상실한 고령자의 재산 중 본인이나 가족이 제대로 관리·운용하지 못하는 자산을 의미한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치매 환자가 보유한 치매머니 규모는 올해 기준 약 172조원으로,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6.9%에 해당한다. 급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에 2050년에는 그 규모가 488조원까지 불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막대한 자산은 대부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채 사실상 '동결 상태'에 놓여 있다. 금융회사들이 본인 확인이 불가능한 경우 거래를 제한하고 있어 사망 후 상속이 이뤄지기 전까지 자산을 사실상 사용할 수 없는 구조다. 거액의 자산이 가계 소비나 민간 투자로 이어지지 못하고 경제 전반의 순환에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보호 장치가 미비한 탓에 가족 간 분쟁은 물론, 보이스피싱이나 무단 인출 등 금융 범죄로 이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에 정부는 올해부터 치매안심재산관리, 즉 공공신탁 제도를 도입해 치매 환자의 재산을 돌봄 서비스와 연계·관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제도는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내세웠던 '안전한 노후 생활 보장' 공약의 핵심 과제로 고령층의 자산을 공공기관이 안전하게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국민연금공단 등 신뢰도 높은 기관이 '국가 공인 재산 집사' 역할을 맡아 고령자의 재산을 대신 운용하고 생활비나 요양비 등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 |
제도 안착까지는 난관이 예상된다. 현장에서는 치매 환자 가족의 반발, 고령층의 심리적 거부감, 신탁 이후 실제 치매가 발병했을 때 본인이 신탁 해지를 요구할 경우 그 법적 처리 방식 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다. 평생 재산을 직접 관리해온 고령층 특성상 "통장은 내가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고 일부 가족은 상속권 침해를 이유로 신탁 위탁을 반대하는 사례도 발생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제도 설계 단계에서 이러한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는 안전장치 마련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한다. 계약서상 해지 조건과 절차를 명확히 규정하고 신탁기관의 자산 운용 내역을 정기적으로 공개하는 등 투명한 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해상충을 방지하기 위해 독립적인 감독기구를 설치하거나 법원·후견 판사의 사전 승인 절차를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공공신탁 도입과 더불어 인공지능(AI) 기반 거래 모니터링, 후견제도 보완 등 실질적인 대응 체계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이미 치매 환자를 위한 성년후견제도와 가족신탁을 적극 활용하며 제도적 기반을 다져왔다.
일본의 성년후견제도는 법원이 후견인을 선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며 판단 능력이 있을 때는 본인이 미리 계약을 통해 지정할 수도 있다. 특히 정부는 '친족후견인 지원사업'을 통해 가족이 후견인 역할을 맡을 경우 전문가의 자문과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다. 가족신탁 역시 고령자가 건강할 때 미리 가족에게 자산을 맡겨 치매가 발병하더라도 생활비와 요양비 등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구조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일본이 금융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AI 기술을 금융 보호 시스템에 접목했다는 것이다. 엑사위저즈(ExaWizards) 등 일본의 AI 스타트업이 개발한 거래 감시 시스템은 후쿠오카은행 등 주요 금융기관에 도입돼 있다. 이 시스템은 고액 인출, 반복 거래, 해외 송금 등 이상 거래를 실시간으로 감지해 자동 차단하며 위험이 감지될 시 보호자와 은행에 즉시 알림을 보낸다.
스위스 역시 고령층 자산 보호를 위한 제도를 운영 중이다. 고령자가 건강할 때 자신의 자산 처리 권한을 미리 위임할 수 있는 사전의료지시서(Advance Care Directive) 제도를 통해 판단 능력 저하 이후에는 지정한 대리인이 자산을 대신 관리할 수 있다. 또 치매나 인지장애 고령자를 위한 맞춤형 프라이빗뱅킹 서비스를 도입해 신탁형 자산관리 상품을 운영하는 등, 노인 자산의 안전한 운용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