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동안 이어진 고환율이 최근 들어 급등하면서 과거 국가 부도 수준을 넘어서 우려된다. 원자재·중간재 가격이 치솟고 해외 투자 비용까지 불어나면서 기업들의 이중·삼중 고통이 커지고 있다. 수출 기업들 역시 장기적으로 가격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내비친다.
당장 환율 상승에 대응할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환율 상승이 국내 투자자의 해외 주식 투자 확대와 엔화 약세 동조 흐름 등 단기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18일 서울외환시장 집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이날까지 원·달러 평균 환율은 1415.83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평균 1394.97원,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이어진 2009년의 1276.35원을 모두 웃도는 수준이다. 연초에는 계엄 사태와 미국의 관세 압박이 겹치면서 환율이 한때 1480원대까지 급등했다. 이후 5월을 전후해 1300원대에서 진정되는 흐름을 보였지만 경상수지 흑자가 사상 최대 규모로 확대되고 대외 신인도도 견조한 상황임에도 환율이 금융위기 수준 이상에서 고착되는 모습이다.
원·달러 환율이 장기간 치솟으면서 기업들도 비상이다. 주요 원자재를 해외에서 들여와 가공·제조·판매하는 업종에서는 부담이 급증했다. 한국 수입의 80% 이상이 달러로 결제되는 만큼 환율 상승이 곧 원자재·중간재 가격 인상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지난달 석탄·원유·천연가스·광산품 등 주요 원재료의 수입물가지수는 165.17이다. 이는 2020년 10월(91.56) 대비 80.4% 높은 수준이다. 수입물가지수는 2020년을 기준치(100)로 삼아 변동을 파악하는 지표다. 같은 기간 컴퓨터·주변기기, 비철금속 등 중간재 수입물가지수 역시 39.5% 상승했다.
대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곳이 석유화학업계다. 석유화학 기업들은 대부분 나프타를 수입해 열분해 공정을 거쳐 에틸렌·프로필렌·합성수지 등을 생산하는 구조여서 환율이 오를수록 원가 부담이 즉시 반영된다. 중국산 저가 제품의 공급 과잉, 글로벌 경기 둔화로 제품 수요까지 위축된 가운데 원가 상승이 겹쳐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다.
환차손도 문제다. 원유를 달러로 조달하는 정유업계가 고환율로 인한 환차손의 직격탄을 맞았다. 국내 정유사들은 대량의 원유를 미리 확보한 뒤 수개월 후 달러로 결제하는 방식을 쓰는데 이 과정에서 결제 시점의 환율 상승분이 고스란히 환차손으로 반영된다. 통상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정유업계의 환차손이 약 1000억원 증가한다.
해외 투자를 확대해 온 기업들에도 고환율은 큰 부담이다. 주요 대기업들은 해외에서 공장 신설과 생산·연구개발 투자를 지속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투자비와 운영비의 상당 부분이 달러로 책정되거나 달러에 연동된다. 환율이 오를수록 필요한 자금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올해 초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 강화로 국내 기업들이 미국 생산 거점을 확대하는 과정이어서 고환율의 충격은 더욱 크다. 미국에서 신설하거나 증설 중인 공장만 최소 22곳에 달한다.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을 비롯해 삼성전자, 삼성SDI, SK하이닉스, SK온, CJ제일제당, LS전선 등 주요 기업들이 반도체·배터리·전선·식품 등 다양한 산업군에서 대규모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환 헤지 역량이 취약한 중소기업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중소 제조기업의 영업이익 중 환차손이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이른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서는 중소기업의 49.3%가 환율 리스크에 대응할 전략이나 수단을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로 나타났다.
수출 비중이 높은 기업들도 우려가 크다. 최근 고환율을 이유로 해외 바이어들이 단가를 과도하게 인하하려는 이른바 '후려치기'를 시도하는 사례도 늘면서 기업들의 부담이 커진다. 수출 중심 기업 관계자는 "원자재값이 치솟아 제조원가가 계속 오르는데 바이어들은 '환율 이익이 있으니 단가를 낮출 수 있지 않으냐'며 압박을 더 강하게 넣고 있다"며 "고환율이 길어지면 해외에서 가격 경쟁력까지 떨어져 해외 시장 점유율을 잃는 상황도 현실화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