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옮기면 직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잠시나마 왕따가 되기 쉽다. 그런데 직급이나 신참에 대한 벽이 그나마 약해지는 곳이 있다. 흡연구역이 그렇다.
흡연자 수가 줄어든 요즘, 사무실과 최대한 거리를 둔 흡연구역은 소수의 흡연인들이 더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공간이다.
흡연구역은 담배만 피우는 곳이 아니다. 뒷담화를 하는 곳이다. 뒷담화를 듣는 곳이기도 하다.
■ 조직의 숨은 풍향계, 뒷담화의 두 얼굴
조직에서 가장 큰 문제는 흔히 생각하는 매출 부진, 프로젝트 지연, 인력 부족 같은 표면적 이슈들이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대부분 그 아래 깔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관계의 진정한 모습은 정식 회의록이나 공식 보고서에 담기지 않는다. 가장 솔직하고 날것의 신호는 바로 뒷담화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회의가 끝나고 복도 구석에서 들리는 작은 속삭임. 점심시간 식당에서 오가는 낮은 목소리. 화장실, 그리고 흡연구역의 소소한 소리들이다.
"저 사람, 진짜 일 안 해."
"이번 결정, 좀 이상하지 않아?"
사소해 보이는 몇 마디가 팀 분위기를 흔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의 풍향계를 가늠하게도 한다. 단순한 수다 같지만, 그 속에는 팀원 간 긴장과 불만, 신뢰의 정도, 심지어 다음 전략에 대한 암묵적 평가까지 담겨 있다.
■'침묵의 나선'과 대나무숲
이 현상은 엘리자베스 노엘레-노이만의 '침묵의 나선' 이론으로 설명된다. 핵심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 다수와 다르다고 느낄 때, 고립될 것을 두려워해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뒷담화는 바로 이 침묵의 나선이 작동하는 방식과 직접 연결된다. 조직의 공식 소통 창구가 막히거나, 솔직한 의견이 불이익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은 불만을 드러낼 채널을 잃는다. 팀은 표면적으로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불만은 더 깊숙이 숨어 들어가고 결국 곪는다.
사장 시절, 집무실 한쪽 벽에 커다란 그림을 걸어뒀다. '대나무 숲' 그림이었다. 뒷담화를 '앞담화'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 서랍 속에, 익명 속에 감춰진 불만을 책상 위로, 이름을 걸고 제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과는? 잘 안됐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못 들었고, 듣기 싫은 이야기만 잔뜩 들었다.)
■ 보이지 않는 소리와 '어셔가의 몰락'
에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은 '보이지 않는 소리'가 한 개인과 가문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극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로더릭 어셔는 극도로 예민하고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 곧 몰락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고, 주변의 기이한 소리와 흔들리는 집이라는 풍문을 통해 불안이 증폭된다. 그의 내면적 불안은 현실과 분리되어 망상으로 커지고, 결국 스스로의 망상에 의해 가문 전체를 파멸시킨다.
뒷담화는 어셔 가를 덮친 망상처럼 조직을 망치기도 한다. 불안과 불신을 증폭시키고, 조직의 정상적인 혈액순환을 방해한다. 심해지면, 결국 혈관이 터진다.
■ 양지에 나온 뒷담화
그러나 뒷담화는 동시에 조직의 생존에 필요한 소중한 경고를 담고 있다. 고혈압은 심근경색의 주요 위험인자지만, 미리 알고 관리하면 심장마비를 피할 수 있다. 뒷담화를 단순한 험담으로 치부하고 억누르면 독이 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듣고 이해하면 최악을 피하는 약이 될 수 있다.
요즘의 뒷담화는 오프라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블라인드 앱 같은 것들이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는 이유가 있다. 공식 채널에서 말할 수 없는 진실, 직장 내 불만, 임금 문제, 불합리한 의사결정에 대한 솔직한 목소리를 익명이라는 안전장치 속에서 터뜨리는 것이다.
게다가 뒷담화 속에는 조직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한 단서가 담겨 있다. 공식 채널로는 말하기 어려운 진짜 속마음을 드러내고, 보이지 않는 정보를 교환하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집단지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진짜 '대나무숲' 역할을 하기도 한다.
뒷담화는 두 얼굴을 가진 언어다. 오늘날에는 절반쯤 양지(陽地)에 나와 있다.
단순한 잡음으로 흘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귀 기울여 조직의 숨겨진 지도를 완성할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조직이 '어셔가의 몰락'처럼 스스로의 망상에 갇혀 몰락할지, 아니면 양지에서 소통하며 단단히 성장할지 결정하게 한다.
**당부 말씀: 이런저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좋은 뒷담화의 단서를 못 찾았다면, 다시 담배라도 피워보시길. 건강은 책임 못 진다. 이 글을 읽고 다시 피우게 됐다는 변명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각오는 하셔야겠다, 행운을 빈다.
김영태
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