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장 공정의 기준과 노동법의 역할이 세대 변화·산업구조 전환 속에서 근본적으로 재정립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사진은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2026 노사관계 전망과 과제' 세미나가 진행되는 모습. /사진=김성아 기자

노동시장 공정의 기준과 노동법의 역할이 세대 변화·산업구조 전환 속에서 근본적으로 재정립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기존 노동법의 작동 원리만으로는 새롭게 등장하는 노동 약자 보호와 갈등 조정에 한계가 뚜렷한 만큼 사회적 보호가 필요한 대상을 더 정밀하게 찾아내고 이를 뒷받침할 국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권혁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2026 노사관계 전망과 과제' 세미나에서 "1970~1980년대를 살아온 세대가 말하는 공정과 오늘의 청년들이 체감하는 공정은 다르다"며 "노동법이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의 공정, 지금의 노동법이 수행하는 공정, 앞으로 노동법이 수행해야 할 공정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노동법의 출발점부터 짚었다. 노동법이 등장한 배경 자체가 노동시장의 극단적 대립과 갈등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법은 역사가 200년 남짓으로 노동법이 태동하던 시기 노동시장에는 극단적 대립과 이념 갈등이 존재했다"며 "누군가는 죽어가는데 누군가는 살을 찌우는 모습이 공존했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노동법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노동법의 형성 과정도 유사하다고 봤다. 권 교수는 "우리나라도 1970년대 후반 고도 산업화 과정에서 노사 갈등이 극단화됐고 정치적 민주화라는 사회적 과제가 함께 성장하면서 노동법에 이념적 가치가 강하게 내재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시대가 바뀌어도 노동법이 풀어야 할 핵심 질문은 같다고 강조했다. 누구를 약자로 보고,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보호할 것인가를 제때 포착해야 한다는 문제다. 권 교수는 "사회가 바뀔 때마다 입법자가 지금 가장 취약한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잡아내지 못하면 보호가 필요한 사람은 노동권 밖으로 밀려나고 더 이상 보호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 기득권을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곧바로 현행 노동법의 한계로 이어졌다. 그는 한국 노동법이 1980~1990년대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과 규범 사이 괴리가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권 교수는 "노동법은 진화해야 하는데 기존 제도 아래 형성된 기득권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고 노동 문제가 정치 이슈와 얽히면서 개정이 번번이 좌절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고 말했다.

노동법의 '업데이트'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로는 ▲산업구조의 본질적 변화 ▲인공지능(AI)·로봇 확산으로 인한 노동의 디지털화 ▲초고령화 가속 ▲노동시장 양극화를 꼽았다. 그는 "중공업·섬유 중심의 제조업 국가에서 정보통신 국가로 전환됐고 근로자의 상(像)도 청계천 여공에서 개발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며 "변화에 맞는 노동법 제도가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독일에서 논의되는 '노동법 4.0' 개념을 끌어와 한국도 유사한 방향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노동법 4.0은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 보호를 약화하자는 게 아니라 더 촘촘한 기준으로 사회적 보호가 필요한 사람을 찾아내 보다 효과적으로 보호하자는 취지"라며 "이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제도 전환이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정부·근로자·기업이 각각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했다. 먼저 정부 역할과 관련해 독일의 '직업 역량에 관한 기회 제공법' 사례를 들며 "근로자들이 가진 지식이 10년 이상 더 못 쓸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구직자뿐 아니라 재직자에게 직업훈련 기회를 제공하고 기업 부담을 국가가 일부 덜어주는 방식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근로자 측의 변화도 주문했다. 그는 "근로자의 경우에도 지식의 유효기간이 짧아진 시대에 자기역량 개발은 노동법상 핵심 의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기업을 향해서는 "수직적 조직문화로는 고령자의 계속고용이 불가능하다"며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구축해 과업 중심·연령 중립적 직장문화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동법이 지향해야 할 방향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점도 짚었다. 그는 "노동법의 기치가 고용 보장의 유지를 가장 큰 가치로 생각했는데 최근에 독일이 그 패러다임을 바꿨다"며 "독일이 최근 고용관계 유지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 보호로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고용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변화하는 노동시장 속에서 일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가 노동법의 핵심 과제가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