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4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를 잡기 위해 통 큰 빚 탕감정책을 내놨다. 이달 안에 금융위원회 소관인 금융공공기관이 보유한 장기·소액연체채권을 전부 소각하고 연내 금융회사의 채권 소각도 유도할 방침이다. 대상자는 2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25조원에 달하는 빚을 한번에 없애주는 서민금융정책에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머니S>는 정부의 빚 탕감정책을 꼼꼼히 뜯어보고 역대 정권의 채무조정 추진사례를 진단했다. 나아가 채무조정정책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파헤쳤다.<편집자주>


서민들이 빚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돈이 없어 빚을 진 서민들은 채무불이행자로 전락해 우리나라에 경제위기를 몰고 올 뇌관으로 지목됐다.

올 1분기 기준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1360조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6조원(11.1%) 증가했다. 머지않아 1400조원을 넘어설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빚 폭탄에 정부는 강력한 빚 탕감정책을 꺼냈다. 정부 소관의 금융공공기관이 보유한 소액·장기채권을 전부 소각하고 금융회사의 악성채권도 자율소각토록 유도할 방침이다.

금융전문가들은 정부의 빚 탕감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경제위기를 겪은 선진국의 서민금융 지원사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성공사례에선 노하우를, 실패사례에선 교훈을 배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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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사례1: 미국, 강력한 가계부채프로그램
우리보다 먼저 경제위기를 겪은 미국은 단기간에 가계부채를 줄인 국가로 꼽힌다. 비결은 강력한 가계부채 감축프로그램이다.

미국정부는 2008년 금융위기 직후 담보대출 조정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가계 빚이 73만달러(약 8억5000만원) 이하인 대출자의 상환금이 총소득의 31%를 넘지 않도록 풀어주고 대출금리도 2%까지 낮췄다. 정부는 300억달러(약 40조원)를 투입했고 4년간 110만명에게 월평균 546달러(약 64만원)의 빚 부담을 줄여줬다.


그 결과 2008년 135%였던 미국의 가계부채비율(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비율)이 2013년 105%로 떨어졌다. 또 개인 소비지출 증가율은 2012년 1.8%에서 2013년 2.4%로 상승했다.

세금을 투입해 서민의 빚을 줄여주는 정책은 우리나라의 서민금융지원정책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서민의 재산형성과 경제적 자립을 주도한 주체가 정부가 아닌 금융회사라는 점에서 다르다. 미국 금융회사는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대규모 장기·연체채권을 소각하고 비소구 대출을 통해 부실 리스크를 상쇄했다.

유한책임대출로 불리는 비소구 주택담보대출은 집값이 대출금 이하로 떨어져도 대출자는 집만 반납하면 추가로 남은 빚을 갚지 않아도 되고 은행이 일정 손실을 안는 구조다. 집이 없는 서민이 생활비까지 은행에 묶이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은행권 수익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대출자가 전략적 파산 등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금융당국과 은행이 비소구 대출 도입을 꺼리고 있다.

박춘성 금융연구원 연구원은 “비소구 대출을 도입하면 주택가격이 떨어져도 가계의 소비 여력이 유지되고 금융사도 여신심사를 강화하게 된다”며 “정부와 금융회사가 서민의 가계부채 부담을 줄여주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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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사례2: 아이슬란드·영국, 조기 대응 돋보여
유럽에선 가계부채 위기를 빠르게 극복한 아이슬란드와 영국이 눈에 띈다. 두 국가는 가계부채 문제가 불거지기 전 조기에 부채구조조정프로그램을 실시해 경제위기에서 벗어났다.

아이슬란드의 부채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상환부담 평활화 ▲채무자·채권자간 직접협상 유도 ▲주택담보대출 상환부담 경감 등 3단계로 나뉜다. 대상은 환율과 소비자물가 연동 주택담보대출, 주택가격의 70% 이상을 상환할 능력이 있는 가계, 주담대 비율이 110%인 가계로 나눠 체계적인 금융지원을 진행한다.

영국은 2009년 주택압류 가능성이 높은 가계에 대해 주택가치를 초과하는 대출금액을 정부(주택협회)가 대신 부담하거나 해당주택을 정부가 매입한 후 해당 가계에 임대하는 부채구조조정프로그램을 시행했다. 그 결과 가계부채 증가에도 소득이 크게 늘어나 가계부채비율을 떨어뜨렸다.

최인협 한국은행 조사역은 “가계부채 문제에 조기 대응한 선진국은 선순환 형태의 경기회복을 유도했다”며 “정부의 재정건전성 유지와 비용분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빠르게 채무상환을 돕는 가계부채 프로그램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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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사례: 스페인·네덜란드, 늑장 대응… 위기 계속
2012년 1000억유로(약 146조원)의 구제금융을 신청한 스페인은 1인당 국민소득과 인구규모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당시 국가부도 직전인 스페인과 우리나라의 경제상황도 매우 닮은 꼴이었다.

스페인은 경기침체와 주택가격 하락이 지속돼 가계의 채무부담이 확대되자 부채조정, 잔존원금 삭감, 주택압류 후 부채감면 등 금융기관 행동규약을 제정해 채무조정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의 가계부채대책이 조기에 시행되지 않았고 금융회사가 재정부담을 호소하며 채무조정에 소홀한 탓에 부채감축과 경기회복 속도가 더뎠다.

네덜란드는 상당기간 가계부채 대책을 시행하지 않다가 2013년 대출증가 억제대책을 내놨다. 주택담보대출 요건을 강화하고 이자에 대한 공제혜택을 축소하는 게 골자였다. 이 대책으로 대출규모가 잠시 주춤하는 듯했지만 2011년부터 젊은층의 채무상환 여력이 취약해지고 주택가격이 하락해 주담대 잔금이 주택가치를 상회하는 위기에 놓였다.

◆채무조정방안 조기 도입… 교육·컨설팅도 지원

전문가들은 선진국처럼 효율적인 채무조정방안을 조기에 도입하고 서민의 재산형성과 경제적 자립에 초점을 맞춘 후속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서민금융은 상업적인 금융서비스가 아닌 만큼 대출자에 대한 교육과 컨설팅프로그램을 동시에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프랑스는 ADIE라는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을 설립, 은행과 제휴해 청년·농촌여성·고령층 등을 대상으로 창업을 지원하는 저금리 소액대출을 제공한다.

프랑스 은행들은 ADIE의 서민고객을 미래의 잠재고객으로 인식해 평균 연 1%의 저금리로 자금을 지원하고 은행 퇴직자를 자원봉사자로 고용해 서민에게 대출과 재정관리 노하우를 전수한다.

조성목 서민금융연구포럼 회장은 “한번 대출해주고 그치는 일회성 지원책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전국 각 구청에 금융주치의를 두고 서민금융 상담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1호(2017년 8월16~2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