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답을 찾는다'는 취임 일성과 함께 신임 장관께서 '답'을 찾으러 간 그 현장은 과연 어디였을까? 바로 국내 굴지의 패션대기업 회의실이었다. 참석자들은 이 기업의 최고경영자인 재벌 3세 등 패션분야 기업인, 이상봉 씨 등 중견 디자이너, 대학교수, 유관부처 관계자 등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날 현장의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현장 방문의 목적이었던 해답도 찾은 모양이다. 간담회 직후 문광부는 2020년까지 5명의 세계적인 스타디자이너를 키우겠다는, 그 날의 '답안지' 내용을 발표했다.
![]() |
◆세계적인 스타디자이너 키우는 게 답은 아니다.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머릿 속에 여러 다른 '현장'의 모습들이 스쳐갔다. 2000여개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는 종로구 창신동의 가파르고 좁은 오르막길, 전봇대 마다 미싱사를 구한다는 전단이 나부대는 성북구 장위동의 골목길, 각종 원단과 부자재가 적재된 좁은 통로사이로 작업지시서 파일을 손에 쥔 디자이너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분주히 오가는 동대문종합시장의 복작대는 풍경.
한국 패션산업을 부흥시키겠다는 야심찬 정책은 기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1조원 가까운 예산이 투입된 '밀라노 프로젝트'를 통해 무엇이 나아지고 바뀌었는지 우리는 지금껏 알지 못한다. 문화관광부의 '세계적 스타 디자이너' 아젠다 역시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몇해 전부터 정부예산을 들여 이른바 국내에서 잘 나간다는 디자이너들을 뉴욕 패션무대에 진출시키고자 무던히도 애를 쓴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국내 무대에서 이미 성공했으며 대기업의 지원까지 받고 있는 그들이, 자기 돈도 아닌 정부 예산으로 뉴욕에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런데도 또 다시 현장에 답을 찾았다며 하는 이야기가 "정부가 나서서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를 키우겠다"는 동어반복이다. 시장의 변화와 역동성이 갈수록 고도화되는 현실에서 관제 스타 디자이너의 탄생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이야긴지는 차치하기로 하자. 일각에선 레이가와쿠보, 이세이 미야케 등 세계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일본 디자이너들의 배경에 일본 정부가 있었다는 뜬금없는 분석도 있긴하나 백번 양보해서 이런 분석이 맞다쳐도 그건 그야말로 "쌍팔년도" 이야기 아닌가. 그리고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를 키운다 한들 저절로 산업이 발전하나? 박지성, 이영표, 차두리, 손흥민 만으론 부족해서 K리그 관중석이 점점 더 썰렁해지나?
![]() |
◆한국적 패션 경쟁력, 봉제 생태계를 살려라
명색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이처럼 일본의 1980년대 패션정책을 뒤쫓는 복고풍에 취해있는 동안 정작 일본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본 정부, 패션업계 그리고 이세이 미야케 같은 정상급 디자이너가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게 바로 일본 자국 내 패션 제조업의 부활이다. 이러한 노력에 따라 일본 내 봉제업이 최근 들어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심지어 젊은층까지 봉제인력으로 유입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정부와 패션업계가 그토록 동경하는 뉴욕은 어떨까? 요즘 뉴욕패션계의 관심은 온통 지역 내 봉제업 몰락과 이에 따른 경쟁력 약화에 대한 우려로 모아지고 있다. 뉴욕타임즈의 패션 평론가 캐시 호린은 업계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뉴욕은 이제 노하우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팔기만 할 뿐이다. 우리는 판매 전문가가 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전 세계에서 재능과 열정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모여들고 엄청난 소비시장을 형성해 우리 패션업계의 동경이 대상이 된 뉴욕패션계는 왜 이런 걱정을 하고 있을까? 이들은 패션산업이 발전하게 된 기저에 디자인 경쟁력과 함께 생산기술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시가 소규모 의류업체들을 보호하는 가먼트 디스트릭트 조닝규제를 해제한다고 했을 때 디자이너들이 발 벗고 나서 반대 캠페인을 펼쳤던 건 그 때문이다.
뉴욕의 패션 전문가들은 오히려 한국 봉제의 경쟁력을 추억하며 부러워하고 있다. 캐시 호린이 인터뷰한 베테랑 제품생산 스페셜리스트 신디 페라라는 "한국의 봉제 방식은 매우 혁신적이고 스마트하다. 재봉사-보조로 구성된 소규모 라인은 속도와 품질을 모두 만족시킨다"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가진 우리 봉제산업이 정부와 업계의 외면 속에 고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미 앞선 국가들의 뒤꽁무니만 쫓아서는 결코 앞서거나 비슷해질 수조차 없다.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전략은 우리만의 장점을 더 경쟁력있게 개발하며 새롭고 지속가능한 산업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다. 지금 정부가 할 일은 태능선수촌에서 금메달 몇개 만들어내듯 스타 디자이너 몇명을 해외 진출시키는 게 아니다. 패션이라는 문화산업에선 관이 나서서 금메달을 조련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 필요한 일은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봉제라는 역사적 자원이 있다. 중국보다 많은 수의 젊은 디자이너들도 있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이 남은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