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갈등은 제조업 기반 한국산업의 가장 큰 위협으로 꼽힌다. 갈등의 핵심 뇌관은 ‘통상임금’ 문제다. 산업 성장속도에 비해 노동자의 권리가 느리게 제도화되면서 뒤늦게 반작용이 터져나오는 것. 자칫 뇌관이 잘못 터지면 한국 제조업은 절체절명의 위기로 치닫는다. 지금도 수많은 기업이 통상임금을 놓고 소송을 진행 중이다. 최근 1심 판결이 난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반환소송은 통상임금 갈등의 상징과도 같다. 기아차 판결을 통해 우리 제조업이 직면한 통상임금 문제를 들여다봤다.<편집자주>



/사진=뉴시스 박태훈 기자
/사진=뉴시스 박태훈 기자



8조3673억원. 현재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 중인 종업원 450명 이상 주요기업 25곳이 패소할 경우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다. “미지급 임금이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면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의칙(신의성실의 원칙)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 전체 부담액은 최대 38조원을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100인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 중인 기업을 집계한 결과 지난 8월 기준 115개사에 달했으며 소송은 총 103건으로 종결된 4건을 제외하면 총 99건이 진행 중이다. 종업원 450명 이상의 중견·대기업은 35개사다.

기업들은 이 같은 상황에 억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통상임금이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섣부른 판결이 이뤄져서다. ‘폭풍성장’을 거듭하며 추가근무가 당연시됐던 시대가 있었다. 그대로 채용과 계약이 이어졌고 회사와 노조가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지금 상황은 노사정 공동의 착오가 빚어낸 참극이다.


이번 기아자동차 통상임금 소송 1심 판결에 따라 우리 산업계가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크게 3가지다. 당장 소송에 따른 손실을 막을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관련업계로 파장이 번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무엇보다 문제의 근원인 통상임금의 정의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① 천문학적 손실 어찌할꼬

재판부는 이번 판결에서 기아차가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지속적으로 상당한 당기순이익을 거뒀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정·경영상태, 매출과 실적 등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 아래 이번 판결로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기업존립이 위태로울 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


본사 앞에 모인 현대기아차그룹계열사 노동자들. /뉴시스 임태훈 기자
본사 앞에 모인 현대기아차그룹계열사 노동자들. /뉴시스 임태훈 기자


기아차는 이번 판결에 따라 실제 잠정 부담금액인 1조원을 즉시충당금으로 적립해야 한다. 증권가에서는 최대 1조5000억원 규모를 예상하기도 했다. 회사는 올 상반기 영업이익이 7868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3분기 영업이익의 적자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주장을 폈다. 나아가 올 상반기 실적이 2010년 이후 최저수준을 기록했음에도 ‘신의칙’이 인정되지 않은 점에 유감을 표명했다.
사실상 회사측이 패소하면서 자동차업계는 물론 산업계 전반에 긴장감이 감돈다. 그동안 통상임금과 관련된 판결이 오락가락하며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번 판결이 앞으로 줄지어 진행될 소송에서 중요한 기준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이 같은 상황을 우려한 한국자동차산업협회도 공식 입장을 밝혔다. 그간의 통상임금에 대한 노사합의와 사회적 관례, 정부의 행정지침,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생태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등을 고려하지 않은 판결이라고 목소리를 낸 것이다.


또 과다한 인건비로 경쟁력이 저하된 상황에서 막대한 비용부담이 생기면 해당 기업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다른 완성차업체와 협력업체로도 부담이 전이돼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위기가 가중될 것을 우려했다.

앞서 2014년 3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인 한국지엠의 사례도 이 같은 우려를 뒷받침한다.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면서 최근 3년간 인건비 부담이 5000억원 가까이 늘어난 데다 판매감소가 이어지며 한국 철수설까지 나돌았기 때문.

하지만 긍정적인 사례도 있다. 회생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르노삼성은 2015년 노사가 한발씩 양보하며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했지만 10종의 수당을 포함시켜 서로 윈윈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협회는 상급심에서 산업 생태계의 경쟁력과 위기요인을 고려해 미래의 추가 인건비 상승부담이 없는 판결을 내려야한다는 입장이다.


② '도미노 피해' 막아야

이번 기아차 판결은 대형업체보다 협력사들이 마음을 졸였다. 부품을 납품받는 대형업체에 경영차질이 생기면 해당 손실을 원가절감으로 상쇄하려 할 게 뻔해서다. 부품단가 인하 압박으로 관련업계의 연쇄 경영악화가 우려되는 이유다.


집회로 빚어진 도심 교통체증. /사진 임태훈 기자
집회로 빚어진 도심 교통체증. /사진 임태훈 기자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도 이번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봤다. “법원이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위기와 중소 부품업체에 미칠 악영향을 외면한 판결을 내렸다”면서 유감을 표했다. 현재 통상임금 문제는 과거 노사정 공동의 착오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모든 책임을 기업에만 지게 하는 불공평한 처사라는 것.
이와 관련해 부품업계 관계자는 “기아차의 3분기 영업이익이 적자로 돌아서면 협력업체 대금결제에도 악영향이 불가피하다”면서 “특히 1차 협력 부품업체가 자금회수에 어려움을 겪으면 곧바로 영세한 2차 협력업체로 유동성위기가 이어진다”고 전했다.

상대적 박탈감 문제도 제기됐다. 기아차 조합원은 1인 평균 1543만원에 달하는 소급분을 지급받지만 협력업체 근로자에게는 꿈같은 일일 뿐이다. 게다가 유사한 상여금제도를 운영 중인 중소협력업체로 소송이 확산되면 노사간 심각한 갈등은 물론 최종 부품을 공급받는 업체로 피해가 확산될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 같은 이유로 부품업계에서는 통상임금 소송의 승자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경영난을 가중시킴으로써 결국 근로자에게 피해가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조용히 지나갔으면 하는 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일을 겪고 싶지 않은 부품업계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③ 통상임금 기준마련이 먼저

재판부는 그동안 이어진 수많은 소송에서 어떤 판단을 했을까. 도재형 이화여대 교수의 저서 <노동법의 회생>에 따르면 1990년대 초 통상임금 법리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임금일체설의 채택이 그 법리에 영향을 미쳤다. 또 2012년 금아리무진 사건 이후 진행된 논쟁과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정기상여금 통상임금 인정 판결이 현재 소송의 분수령으로 작용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소송을 진행 중인 기업들은 그동안 정부와 사법부의 통상임금 해석범위가 불일치해왔던 만큼 통상임금 정의 규정 입법화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아울러 신의칙·고정성에 대한 구체적 지침이 부재한 점과 소급분에 대한 신의칙 적용 문제도 지적됐다. 또 임금체계 개편도 수반돼야 통상임금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고 봤다.

유환익 한국경제연구원 정책본부장은 “통상임금 정의 규정을 입법화하고 신의칙 등에 대한 세부지침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면서 “신의칙 인정 여부는 관련 기업의 재무제표 분석뿐만 아니라 국내외 시장환경, 미래 투자애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자동차산업협회도 공식 입장표명을 통해 “통상임금 문제의 지속적인 법적 쟁송화에 따른 경영의 불확실성과 노사간의 대립적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해야 한다”면서 “통상임금을 1임금산정기간(월급 근로자의 경우 1개월)에 지급되는 임금으로 규정한 현행 고용노동부의 행정지침(고용노동부예규 제47호, 2012년9월25일 시행)대로 법제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거들었다.

이에 재계 관계자는 “근로기준법 시행령에는 통상임금 정의가 한줄뿐이며 그 범위는 고용노동부 지침이 기준이었으나 법원판결로 정기상여금 등으로 확대됐다”면서 “통상임금을 다시 정의하고 신의칙, 고정성과 관련된 지침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4호(2017년 9월6~1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