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타이베이 한국학교에 자리한 조명하 선생 흉상. /사진=양소희
타이완 타이베이 한국학교에 자리한 조명하 선생 흉상. /사진=양소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조명하(1905~1928). 그는 1928년 5월14일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臺灣) 타이중(臺中)에서 일본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인 구니노미야(久邇宮邦彦王) 육군대장을 암살했다. 조명하는 현장에서 잡혀 타이베이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는 말을 남긴 후 순국했다.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조명하 의거는 단독거사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한국인의 강한 의지가 얼마나 뼛속 깊은지를 일본에 알려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1978년 타이베이 한국학교가 조명하의 동상을 건립하고 애국의 큰 뜻을 기리고 있다.
1905년 황해도 송화(松禾)에서 태어난 조명하는 1926년 3월 신천군청의 직원으로 일한다. 김구, 노백린, 이재명 선생 등 같은 황해도 출신의 독립운동을 전해 듣고 또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을 거치며 애국독립의 정신을 가슴에 품게 된다.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1920년 일본으로 간다. 주경야독하는 동안 일본인의 차별대우와 모욕적 언사를 수없이 당하며 조국독립의 염원을 더욱 굳게 다짐한다. 일본에서는 거사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당시에는 일본군의 통제와 감시가 철저해 일단 타이완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갈 생각으로 타이완으로 향했다.


타이완에서 일하며 상해로 갈 기회를 살피던 중에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육군대장을 육군특별검열사로 타이완에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시 일제는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일본의 산둥성 출병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그 전진기지로 타이완은 중요한 거점이었다.

타이중으로 가서 부근의 정황을 세밀하게 정찰하며 암살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5월14일 타이중시의 도로 양쪽에는 물 샐 틈 없이 경비군경들이 늘어섰다. 오전 9시55분쯤 구니노미야를 태운 무개차(지붕 없는 차)가 타이중 도서관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려는 순간 일본인 환영 인파에 몸을 숨기고 있던 조명하는 독약을 바른 단도를 들고 날쌔게 자동차 뒤쪽으로 뛰어 들었다. 위험을 느낀 운전사는 속력을 냈고 조명하는 그를 향해 단검을 힘껏 던졌다. 칼은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쳐 상처를 입힌 뒤 운전사의 등에 박혔다. 순식간이었다.

조명하 선생의 흉상이 있는 타이베이 한국학교. /사진=양소희
조명하 선생의 흉상이 있는 타이베이 한국학교. /사진=양소희
조명하는 거사 후 군중을 향해 “당신들은 놀라지 말라. 나는 대한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다”고 외쳤다. 또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대한독립에 대한 집념을 세상에 알렸다. 현장에서 붙잡혀 타이중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6월14일 타이베이 형무소로 이송되어 그해 7월 18일 타이완고등법원 특별공판정에서 황족위해죄(皇族危害罪)와 불경사건(不敬事件)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조명하는 순국 직전 할 말이 없느냐는 형리의 질문에 의연하게 말했다.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조명하는 10월10일 타이베이시의 형장에서 처형됐다.


그가 순국한지 3개월 17일 뒤인 1929년 1월 27일 구니노미야는 단검의 독약이 온 몸에 퍼져 목숨을 잃었다. 조명하의 단독 거사가 성공한 것이다. 조명하 의거는 안중근, 윤봉길에 견줄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그의 유택이 마련됐고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타이완 한국교민회 성금으로 1978년 5월14일 타이베이 한국학교에 조명하의 동상을 건립하고 애국의 큰 뜻을 기리고 있다.

☞글·사진=양소희(여행작가)

저서로는 <ENJOY 타이완>, <화천에서 놀자>, <담양여행>, <인천섬여행>, <부산에 반하다> 등이 있다. 특히 강연, 방송, 국내외 여행 콘텐츠 개발 등 여행관련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