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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타니 국기./사진=위키피디아 |
최악의 현대판 노예국으로 불린 아프리카 모리타니 수도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모리타니는 아프리카 북서부의 사하라 사막 서쪽에 위치한 국가로 수도는 누악쇼트다. 모리타니의 원주민은 흑인과 베르베르인이었다. 하지만 11세기 가나 제국을 정복한 베르베르계의 알모라비드 왕국이 이곳에서 발전하면서 무어인이 형성됐다.
17세기엔 영국과 프랑스도 해안까지 왔으며 1659년에는 프랑스가 세네갈강 하구의 생루이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후 프랑스는 1814년 파리조약으로 모리타니 해안지역 개발하고 지배권을 장악했다.
프랑스는 1850년대부터 세네갈강 하류지역을 지배하고 1920년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일부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58년 프랑스 공동체 내의 자치 공화국이 됐고 1959년 5월 선거에서 모크타르 울드 다다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정부를 수립했다. 1960년 11월 28일에 모크타르 울드 다다를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독립국이 되었다.
모리타니가 독립할 당시 모로코가 영유권을 주장하여 대립관계에 있었다. 그 후 관계가 개선돼 1973년엔 아랍연맹에 가맹했다.
1976년 4월 에스파냐령 사하라(서사하라)를 모로코와 분할·영유하는 협정을 체결하면서 모로코의 동맹국이 됐다. 알제리의 지지를 받고 있는 서사하라 독립운동 ‘폴리사리오전선’과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이 전쟁이 원인이 돼 1978년 7월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대통령 다다 등은 체포되고 정당과 의회도 해산됐다.
대령 무스타파 울드 살레크가 국가부흥 군사위원회 의장에 취임, 국가원수로서 새 정권을 발족시키고 폴리사리오 간의 휴전 합의로 서사하라의 영유권을 포기했다.
이후 몇 번의 쿠데타를 거쳐 1984년에는 전 총리인 대령 마우야 울드 시디 아메드 타야가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고 1992년 재선을 거쳐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승리했다.
2013년 호주의 인권단체인 워크프리재단(WFF)은 세계 162개국을 대상으로 강제노동, 아동노동, 인신매매 등 현대판 노예제 관행을 조사했고 모리타니를 노예문제가 가장 심각한 국가로 꼽았다.
최악의 노예국이 된 이유는?
보고서에 따르면 모리타니는 인구당 노예비율과 아동결혼·인신매매 수준을 합산한 '노예문제' 평균 측정치가 100점 만점 중 97.9점에 달해 조사 대상국 중 수치가 가장 높았다.당시 모리타니는 국민 380만명 중 약 4%(15만1000명)가 노예 상태로 일부 인권 단체에서는 이 나라 노예 비율이 최대 20%이라는 추산도 나왔다.
모리타니의 노예제는 주로 조선시대 노비처럼 대물림되는 형태로 운영된다. 현지 정부는 노예와 인신매매를 금지했지만 국토 4분의 3이 사막이라 당국의 단속이 유명무실한 곳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