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종무식에서 임직원들에게 격려인사를 하고 있는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 / 사진=고려아연

6일 별세한 고(故)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은 34세에 사업에 뛰어든 후, 무려 50년간 고려아연과의 동행을 이어온 인물이다. 창립 멤버 중 유일하게 현직에 남아 회사의 발전을 위해 쉼 없이 노력해왔단 평가다.

끝없는 도전, 위기를 기회로 만들다

최 명예회장은 1973년 10월 미국에서 MBA와 3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영풍광업에서 재무·회계업무를 맡았다. 8개월이 흘렀을 무렵에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같은 해 정부에서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고, 당시 아연·연 광산 사업을 하던 고려아연이 제련업종 담당 기업으로 선정됐다. 대한민국이 중화학공업 육성의 신호탄을 쏜 시기가 이때였다.

그렇게 비철금속제련사업이 시작됐고, 최 명예회장은 정부·금융회사 등 여러 관계자들과의 계속된 협의 끝에 1974년 8월1일 단독회사를 설립했다. 기술·자금·경험 없이 시작하기엔 매우 큰 규모의 사업이지만, 최 명예회장은 '도전'이라는 단어의 힘을 믿고 열정적으로 사업일 일궈나갔다.


그러나 사업 자금을 확보하는 건 어려운 문제였다. 최 명예회장은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에선 국민투자기금과 산업은행 등에서 빌렸고, 수소문 끝에 IFC를 알게 됐다. IFC에서 사업자금으로 7000만불(약 700억)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5000만불에 해낼 수 있다 설득했다. 5000만불을 부채 60%, 자기자본 40% 비율로 맞춰 오라는 부분도 7:3으로 협상했다. 결국 IFC에서 1300만불을 빌려주고, 400만불을 자본금으로 투자했는데, 이는 당시 IFC가 투자한 민간기업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왼쪽). / 사진=고려아연

부족한 자금으로 건설을 시작하다 보니 턴키방식을 도입하는 건 어려웠다. 당시 국내에는 제련소 건설 경험이 있는 종합건설회사가 부재한 데다가 턴기 계약을 체결했던 해외 건설사들의 마진은 30%가 넘었기 때문이다.

최 명예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턴키계약 대신 직접구매에서 건설까지 하는 방법을 택했다. 모든 것을 내 손으로 해보겠다는 그의 선택은 비용 절감뿐만 아니라 노하우와 기술을 모두 익히게 되는 '신의 한수'가 됐다. 특히 7000만불을 생각했던 IFC의 예상을 뒤엎고 4500만불로 공사를 완성, 최 명예회장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성장 DNA, 고려아연 성장의 초석이 되다

최 명예회장은 아버지인 최기호 선대회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던 선대회장은 일찍부터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을 하다 보니 주위에 부잣집 아들이 많았지만, 이들이 6.25전쟁으로 38선을 넘어오면서 재산을 다 잃었다는 이야기를 최 명예회장에게 전했다고 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재산을 잃고 나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손에 쥔 재산은 언제든 잃을 수 있지만 머리에 든 재산은 절대 잃지 않는다는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최 명예회장 역시 살아생전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14년 고려아연 창립 40주년에서도 "나는 혁신이나 개혁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매일매일 조금씩 발전해 나가면 한꺼번에 큰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개혁보다는 변화가 중요하다"고 직원들에게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자원 불모지인 대한민국에서 고려아연을 세계 비철금속 1위 기업으로 만든 그의 정신은 고려아연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