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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덜 힘들었으면 좋겠어요. 싸우지 말고 다 같이 잘 살게 정국을 안정시켜줬으면 합니다."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여의주민센터 앞. 택시 기사 강모씨는 사전투표를 마치고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이른 아침 운행을 마친 뒤 서둘러 투표소를 찾았다는 강씨는 "국민 걱정 좀 덜어주는 나라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씨처럼 이른 시간부터 투표소를 찾은 이들의 표심에는 무너진 일상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 끝없이 싸우는 정치에 대한 염증, 그리고 여전히 놓을 수 없는 변화에 대한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직장인, 자영업자, 대학생… 끊이지 않는 시민들 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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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대통령선거 사전투표 첫날, 서울 시내 사전투표소에는 이른 아침부터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려는 유권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날 오후 2시 기준 전국 평균 투표율은 12.34%로 집계됐다. 이는 사전투표 제도가 전국 단위 선거에 처음 도입된 2014년 6·4 지방선거 이후 재·보궐을 제외한 전국 단위 선거 기준으로는 동시간대 가장 높은 수치다. 역대 최고 사전투표율을 기록했던 2022년 대선의 동시간대 투표율(10.48%)보다 1.86%p(포인트)가량 높다.
여의도 주민센터 사전투표소에는 오전 8시 무렵부터 20여명의 유권자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마포구 도화동 주민센터 사전투표소 역시 북적였다. 오전 9시30분 기준 대기 시간은 15분 안팎. 일부 유권자들은 관내·관외 구분을 미처 확인하지 못해 줄을 다시 서는 혼선도 빚었다. 투표소 관리자들이 안내했지만 "동선이 너무 복잡하다"는 불만도 나왔다. 공덕동에서 근무한다는 직장인 이모씨(28)는 "회사 출근 전에 들렀는데 줄이 꽤 길어서 마음이 조급했다"며 "새로운 대통령을 빨리 뽑고 싶어 설레는 마음으로 투표하러 왔다"고 말했다.
오전 11시를 넘기면서부터는 유권자들이 몰려들며 대기 줄이 길게 이어졌다. 12시께엔 투표소 직원이 대기 시간이 1시간 가까이 걸린다고 안내하기도 했다.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30대 직장인 박씨는 "너무 덥다. 땡볕에 서 있으려니 숨이 턱턱 막힌다"면서도 "솔직히 누구를 찍든 크게 기대는 없다. 그래도 국민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점심시간에 나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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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을 활용해 투표소를 찾은 직장인들의 얼굴엔 기대와 회의가 교차하고 있었다. 전경련 회관에서 근무한다는 이씨는 정오 무렵, 점심시간을 쪼개 여의도 주민센터 투표소에 들렀다. 그는 "공약을 꾸준히 내고 현실적인 접근을 하는 것 같아 이재명 후보에게 표를 줬다"며 "다른 후보들은 준비가 덜 된 것 같고 자격 면에서도 솔직히 미덥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완벽한 후보는 아니겠지만 이재명 후보는 추진력이 있고 능력이 출충한 후보라고 생각한다"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함께 나온 직장 동료는 투표를 마친 뒤 "누굴 적극적으로 뽑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누가 더 나쁜지를 가려내기 위한 선택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도 우리가 가진 권리는 결국 투표권뿐이니 지금 상황에서 누가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느냐를 중점으로 보고 투표했다"고 했다.
"여성, 청년, 시니어… 우리도 잊지 말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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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들의 목소리는 다양했다. 청년층은 고용 문제를 여성들은 유권자 분열 조장에 대한 피로감을, 시니어층은 '안정된 나라'를 호소했다. 대학생이라고 밝힌 김씨(25)는 "취업도 어렵고 대한민국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며 "청년층이 존재감을 느낄 수 있고 미래가 보이는 정치를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여성 유권자들도 정치에 대한 깊은 피로감을 토로했다. 도화동 주민이라고 밝힌 오씨는 "선거 때만 되면 여성과 청년을 갈라치기하고 특정 혐오 감정을 자극해 표를 얻는 방식에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며 "이준석 후보가 최근 TV토론에서 또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듯한 '젓가락' 발언을 하는 걸 보고 정말 실망스러웠다"고 했다. 그는 "갈등을 키우는 선동이 정치가 된 것 같다"며 "새 대통령은 바르게, 당당하게 정치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시니어층의 바람은 '안정'에 모아졌다. 신길동에서 만난 70대 남성은 "노후가 불안한 건 나라가 불안해서다"며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기본만 해줬으면 좋겠다. 국민의 말을 진심으로 듣고 국가라는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개인적으로는 70이 넘었다고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게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싸우지 말고 '진짜 정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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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각종 네거티브로 얼룩진 탓에 냉소적인 입장을 내비치는 유권자도 적지 않았다. 여의도 삼보아파트에 거주한다고 밝힌 주부 김씨는 "대선 후보 TV토론을 보고 너무 실망했다"며 "비전이나 정책 대결은 실종되고 서로 헐뜯는 말만 남발하는 모습을 보니 세 후보 모두 너무 비호감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사실 투표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그래도 그나마 나은 사람을 찍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 이곳에 나왔다"고 했다.
지지하는 후보는 제각각이었지만 유권자들이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덕목은 비슷했다. 바로 '통합'과 '경제'. 갈등과 위기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실력 있는 지도자'를 바라는 목소리는 연령을 막론하고 선명했다. 80대 어머니를 모시고 투표소를 찾았다는 여성은 "물가도 오르고 월세도 오르고 애 키우기도 벅차다. 다들 너무 힘들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우리 가족은 어머니부터 자녀들까지 전부 투표하러 갔다. 정치인들도 이런 국민 마음을 잊지 말고 누구 하나만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 다 같이 어깨 펴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비상계엄 논란과 각종 네거티브 공방으로 유권자들의 피로감은 극에 달했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투표소를 찾고 있다. 신길동에 거주하는 50대 김씨는 출근 전 일찌감치 사전투표를 마쳤다며 "민주주의의 꽃이 선거 아니겠나. 정치가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우리가 투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투표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마포구에 사는 70대 남성은 "계엄 논란과 어수선한 정치 상황을 보며 이번 선거는 꼭 참여해야겠다고 다짐했다"며 "사리사욕 없이 국민만 생각하는 진짜 참일꾼 대통령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전투표는 오는 30일 오후 6시까지 전국 3500여개 투표소에서 진행된다. 유권자는 신분증만 지참하면 별도의 신고 없이 전국 어느 사전투표소에서든 투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