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논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백악관)

국내 반도체 업계가 연이은 악재에 흔들리고 있다. 한미 간 반도체 관세 합의가 명문화되지 않은 데다 미국 정부가 중국 공장에 대한 미국산 반도체 장비 반입 허용을 철회해서다.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보조금 지급 조건으로 회사 지분을 요구하면서 업계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명단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국법인을 제외하겠다고 발표했다. VEU는 미국 개별 허가 없이 미국으로부터 특정 품목을 들일 수 있는 예외적 지위다. 이번 명단 제외로 양사는 중국 공장에 미국산 반도체 장비를 반입할 때마다 미국 정부 허가를 받게 됐다. 해당 조치는 이날 기준으로 120일 뒤인 오는 12월31일부터 시행된다.


미국이 장비 규제라는 초강수를 두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타격도 불가피해졌다. 두 기업은 이미 중국에 막대한 설비 투자를 단행했다. 삼성전자는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 쑤저우에 반도체 후공정 공장을 각각 두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다롄에 낸드플래시, 우시에 D램, 충칭에 낸드플래시 후공정 공장을 구축했다.

중국 공장 생산 비중도 상당히 크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공장에서만 전체 낸드플래시의 30~40%를 생산 중이며, SK하이닉스의 경우 우시 공장이 D램 전체 생산의 40%를 맡고 있다. 이들 공장은 주로 범용 제품을 생산하지만, 추후 첨단 공정 전환 고려되는 만큼 미국산 장비 반입 제약이 기술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업계 고민은 이뿐만이 아니다. 한미 관세 협상을 진행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반도체 품목별 관세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유럽연합(EU), 일본 등처럼 최혜국 대우를 약속받으면서 한미 정상회담 기간 품목별 관세 협상이 명문화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불발됐다. 트럼프 정부의 불확실한 정책 기조를 감안할 때 관세 판도가 다시 뒤집힐 가능성도 남아 있다는 지적이다.


관세 협상 문서화가 지연되자 주변국보다 높은 관세가 부과될 수 있단 우려도 나온다. 이미 공동성명을 통해 관세 상한선을 15%로 확정한 EU보다 불리한 국면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EU는 반도체 대미 수출 규모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생각하는 주요 협상 대상이 아닐 수 있다"며 "한국이나 대만, 일본보다 (협상에서) 목소리를 강하게 내는 편이라 15% 관세율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미국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미 투자에 대해 지급하기로 한 보조금 역시 불투명하다. 양사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 확정된 반도체지원법(CSA) 보조금을 바탕으로 대규모 대미 투자를 결정했는데, 트럼프 행정부가 여러 조건을 내세우면서 약속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반도체 기업에 생산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신 회사 지분을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최근 인텔에 대한 CSA 보조금을 전액 출자로 전환해 10% 지분을 확보한 만큼 이를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으로 확대할 가능성도 크다.

트럼프발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 속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진행된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대미 추가 투자를 발표할 거란 전망도 있었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두 회사는 앞으로 상황을 지켜보면서 전략을 강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달 31일 미국 출장 후 귀국길에서 미국의 중국 내 반도체 장비 반출 규제 등을 묻는 말에 "일 열심히 해야죠"라고 답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미국 현지에서 반도체 시장 점검 등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