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국제공항 여객기 참사 유가족들이 보잉 737-800 기종의 낡은 안전 시스템을 문제 삼으며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사진은 사고가 발생한 제주항공 2216편 사고 항공기. /사진=뉴시스

지난해 12월29일 발생한 무안국제공항 여객기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항공기 제조사인 보잉(Boeing)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소송도 병행하되 증거개시(디스커버리)를 활용할 수 있는 미국 소송을 선행해 사고 원인을 규명할 방침이다.

무안공항 참사 유가족의 법률 대리를 맡은 미국 국제항공사건 전문 로펌 허만 로그룹은 16일 서울 강남구 소재 파르나스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소송 제기 배경과 향후 계획을 밝혔다.


앞서 허만 로그룹은 지난 14일 '보잉이 안전하게 항공기를 착륙시킬 수 있는 수단을 조종사들에게서 박탈했다'며 킹카운티 상급법원에 소장을 접수했다.

유가족들은 보잉의 책임을 입증하기 위해 미국에서 먼저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에서는 원고가 결함과 과실을 직접 입증해야 하지만 미국은 증거개시 제도를 통해 피고에게 내부 문서·시험기록 등 자료 제출을 강제할 수 있어 사고 원인 규명에 유리하다. 보잉 본사가 미국에 있어 관할이 명확하고 미국 법원이 인정하는 손해배상 규모와 집행력 측면에서도 실익이 크다는 것도 고려됐다.

법률대리인은 1958년에 설계된 구식의 전기 및 유압 시스템을 현대화하지 않아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보잉에 책임을 묻겠다는 계획이다. 보잉은 1968년 제조된 첫 737기부터 사고 항공기(2009년 인도)에 이르기까지 핵심 전기 및 유압 구조를 현대화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유가족 측 미국 법률대리인인 찰스 허만 변호사는 "참사가 있었던 항공기 보잉 737-800은 1958년에 처음 만들어진 아키텍처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며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스마트폰과 노트북 기술이 66년 전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보잉의 기술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국제항공사건 전문 로펌 허만 로그룹의 수석 변호사 찰스 허만이 16일 서울 강남구 파르나스 호텔에서 기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최유빈 기자

과거 보잉을 상대로 제기한 5건의 소송에서 모두 승소한 허만 변호사는 이번에도 유가족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는 "전기·유압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랜딩기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보잉의 잘못"이라고 했다. 이어 "무안국제공항과 제주항공도 일부 책임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보잉이 보상액을 모두 부담해야 한다"며 "공항과 항공사로부터 보상을 받아내는 것 역시 보잉의 책임"이라고 했다.

핵심 쟁점은 보잉 737-800 기종의 '1958년 설계' 전기·유압 아키텍처와 다중 안전장치 실패다. 허 변호사는 "엔진 고장 여부와 무관하게 플랩·슬랫·에일러론, 랜딩기어 전개, 제동 등 '안전 착륙을 위한 백업 시스템'이 작동했어야 한다"며 "실제 비행기록장치(FDR)·음성기록장치(CVR)·ADSB 트랜스폰더가 동시에 멈추는 등 전기계통의 광범위한 실패 정황이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조류 충돌 가능성에 대해선 "미국 기준으로 엔진은 1파운드급 조류 4마리 흡입에도 출력 75%를 유지해야 한다는 요건이 있다"며 "조류 충돌로 설령 엔진이 꺼졌더라도 항공기의 감속·착륙 안전장치는 작동했어야 한다"고 했다.

소송지는 미국 워싱턴주로 했다. 허만 변호사는 "해당 기종이 워싱턴주에서 제조·판매·인도됐다"며 "보잉 본사 이전 이력(시카고→버지니아)을 감안해 관할·준거법 다툼이 있을 수 있으나 판사의 재량으로 워싱턴·버지니아·대한민국 법 적용이 모두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배상 규모에 대해선 "사망사고의 미국 평균 배상액은 가이드라인상 약 1300만달러(약 185억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며 "구체적인 액수는 과실 비율·경제적 손해 산정 등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다른 로펌과의 협업 여부에 대해선 가능성을 열어뒀다. 허만 변호사는 "현재 미국에서 보잉을 상대로 진행 중인 소송은 우리 팀뿐"이라며 "향후 타 로펌과도 협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내 소송은 무안공항·제주항공 등을 상대로 별도 제기할 계획이다. 국내 소송을 담당하는 임치영 법률사무소 씨앤와이 변호사는 "한국 소송을 진행하되 미국 소송을 담당하는 허만 변호사팀과 공조해 진실 규명을 우선하겠다"며 "한국과 미국 법원의 절차적 차이를 활용해 증거를 최대한 끌어내고 한국 소송에서는 그 결과를 근거로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