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투자사인 그린옥스와 알티미터가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의향서 제출과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무역법 301조에 근거한 조사 요청을 병행하며 한국 정부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사진은 23일 서울시내에 주차된 쿠팡배송 차량 앞을 지나가는 시민의 모습. /사진=뉴스1

쿠팡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 이후 정부 대응을 두고 미국 투자사들이 국제투자분쟁(ISDS)과 통상 보복(무역법 301조) 카드를 동시에 꺼내 들었다. 정부와 국회의 조사가 본질을 벗어난 '타깃 규제'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개별 기업을 둘러싼 사안이 국가 핵심 산업 전반의 통상 리스크로 비화할 가능성이 대두되는 가운데 '법과 원칙'을 강조해온 정부는 국제 규범상 '규제의 비례성'을 입증해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23일 법무부 및 업계에 따르면 쿠팡의 미국 투자사인 그린옥스와 알티미터는 22일(현지시각)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S 중재의향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 이후 우리 정부와 국회가 보인 대응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의 '공정·공평 대우 의무' 등을 위반했다며 수십억달러의 손해배상을 예고했다.


동시에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무역법 301조에 근거한 조사를 요청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해당 조항은 미국 정부가 해외 시장에서 미국 기업에 대한 불공정 행위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관세 등 보복 조처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USTR은 청원서 접수 후 45일 내에 조사 개시 여부를 결정한다.

투자사들은 정부와 국회의 대응이 특정 외국계 기업을 겨냥한 의도적인 과잉 규제라고 주장했다. 개인정보 유출을 넘어 노동·금융·관세 등 경영 전반으로 확대된 점을 '타깃 규제'의 근거로 내세웠다. 한국 국회와 정부의 대응으로 수십억달러의 손실이 발생한 반면 금전적 피해를 주장하는 쿠팡 고객이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 삼은 것으로 전해졌다.

법무부는 '국제투자분쟁대응단'을 중심으로 합동 대응 체계를 수립해 법률적 쟁점을 검토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개인정보 유출 사고의 파급력이 크고 플랫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고려해 법과 원칙에 따른 엄정한 대응이었다는 논리를 펼 것으로 관측된다.

핵심 쟁점은 '규제의 비례성'… "피해와 제재 사이 적절성 입증이 관건"

정부의 제재가 '규제의 비례성' 원칙에 비춰 국제 통상 규범상 허용되는 범위였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다뤄질 전망이다. 손동후 SJKP 미국변호사는 "ISDS 중재판정부는 규제의 공익적 목적과 투자자의 피해 사이의 균형인 비례성의 원칙을 핵심 기준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인정보 유출을 계기로 시작된 조사가 노동·금융·관세 등 기업 전반으로 확대된 것과 실질적인 금전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 단위 과징금이 부과될 가능성이 국제법상 공정·공평 대우(FET) 원칙 위반의 쟁점이 될 수 있다고 짚었다. 그는 "특정 사고를 빌미로 기업의 모든 분야를 털어내는 식의 조사는 투자자에게 보복적 괴롭힘이나 합리적 기대 위반으로 보여질 수 있다"며 "이는 ISDS 중재판정부에서 정부의 악의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근거로 활용될 여지가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정부는 시장 질서 교란에 대한 예방적 억제력과 고유의 규제 권한을 내세우겠지만 국제 관례상 구체적 피해가 입증되지 않은 고액 과징금은 논리적으로 방어하기 까다로운 주제"라며 "'피해의 구체성'과 '제재 수위' 사이의 적절성을 어떻게 입증하느냐가 소송의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산업·통상 전반 흔드는 '복합 쟁점' 부상… 외교적 해법 시급

이번 사안이 개별 기업에 대한 제재 수위 논란을 넘어 한국의 산업 정책과 기업 규제, 통상 전략 전반을 흔드는 '복합 쟁점'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정부의 규제 판단이 통상 리스크와 맞물리는 국면으로 전환됐다는 분석이다.

손 변호사는 " ISDS 중재와 USTR 조사를 병행하는 전략은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규제 냉각효과'를 줄 수 있다"며 "국내법 집행을 강행할 경우 뒤따를 통상 보복과 천문학적 배상금 리스크가 정책 결정에 실질적인 심리적·정치적 구속력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USTR의 보복 조치는 단순히 피해 기업의 업종에 국한되지 않는다"며 "한국의 경우 반도체나 자동차가 (보복) 리스트에 오르는 것은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국내에서 충분한 진상 규명과 정치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안이 국제 분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정조사가 표류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내부적인 논리 보강과 제도적 정비 없이 분쟁의 무대가 국제 영역으로 옮겨가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특정 기업 때리기'라는 오해를 해소하고 이번 조치가 정당한 국내법 집행임을 설득하기 위한 외교적 소통이 시급하다고 제언한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해외 기업이 불이익을 당한다는 통상 논란은 늘 존재해왔으나 특정 기업 하나로 인해 국가 간 통상이 크게 문제 되는 사례는 실무적으로 드물다"며 "미국 정부가 실제 보복에 나설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정부 차원에서 '특정 기업에 불이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국내 고객 피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임을 지속해서 이해시키는 외교적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