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의 미국 투자사인 벤처캐피탈(VC) 그린옥스와 알티미터가 한국 정부의 개인정보 유출 규제 조치에 반발해 22일(현지 시각)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의향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한국 정부에 대한 조사와 관세 부과 등 무역 제재를 취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미국 투자사들이 USTR 조사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이른바 '슈퍼 301조'라 불리는 무역법 301조다. 이는 미국이 교역 상대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해 대통령 권한으로 보복 관세 등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법적 수단으로 과거 주요 통상 분쟁의 핵심 근거로 활용됐다.
무역법 301조는 트럼프 행정부 당시 통상 정책의 주요 수단이었다. 2018년 미국은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 등을 이유로 301조 조사를 발동, 중국산 제품에 보복 관세를 부과했다. 이는 미국의 무역 적자 해소뿐만 아니라 상대국의 제도 변경을 요구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2019년에는 에어버스 보조금 지급을 이유로 유럽연합(EU)의 항공기와 와인 등에 관세를 부과했다.
통상 업계에서는 이번 사안이 2019년 '프랑스 디지털 서비스세(DST) 분쟁'과 유사한 구조를 띠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당시 프랑스가 미국 IT 기업에 세금을 부과하자 USTR은 이를 차별 행위로 간주하고 조사를 개시했다. 이후 프랑스산 샴페인 등에 관세 부과를 예고하며 과세 유예를 끌어냈다. 쿠팡 투자사들 역시 한국 정부의 조치를 '미국 기업 차별'로 규정하고 있어 향후 USTR의 판단이 주목된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쿠팡 개별 이슈를 넘어 한국 주력 산업 전반으로 확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조언한다. 손동후 SJKP 미국변호사는 "301조의 본질은 상대국 정부의 정책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압박 지점을 찾는 것에 있다"며 "프랑스 사례처럼 한국의 반도체나 자동차가 보복 리스트에 오르는 것은 충분히 실질적인 시나리오"라고 분석했다. 이어 "301조는 정치적 칼의 성향이 강하고 ISDS는 법적 방패라고 할 수 있는데 두 절차를 동시에 밟는 것은 양동 작전으로 보인다"며 "통상 보복과 천문학적 배상금 리스크가 정책 결정자들에게 심리적·정치적 구속력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의 데이터 관리 체계가 가진 구조적 특수성이 이번 분쟁의 쟁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이버DB보안 세계 석학이자 국가전산학박사1호로 알려진 문송천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명예교수는 "미국 주장은 정당방위 차원이며 그들 입장에서는 합법적이고도 합리적"이라고 짚었다. 문 교수는 "양국 간 시스템 차이로 인한 개인정보 유출의 무게와 피해 심각성이 다르다는 것을 정부가 충분히 증명해야 할 것"이라며 "미국은 주민등록번호 같은 것이 없지만 한국은 '절대반지'인 주민등록번호 탓에 해커들의 먹을거리가 많은 구조라는 것을 어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안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기보다 외교적 해법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해외 기업이 불이익을 당한다는 통상 논란은 늘 있었지만 특정 기업 하나 때문에 통상이 크게 문제 된 사례는 실무적으로 많지 않다"며 "미국 정부가 실제로 나설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신중론을 폈다. 그러면서 "외교적으로 특정 기업에 불이익을 주려는 게 아니라 국내 피해에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계속 이해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