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요 기업들이 계열회사의 기업공개(IPO)를 전격 중단하면서 지주사 체제 아래 알짜 자회사를 상장시켜 투자금을 확보하려던 대기업들의 전략에 급제동이 걸렸다. HD현대 등 그룹의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꼽히는 분야를 상장시켜 자금을 조달하려던 기업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자회사 중복 상장 논란의 중심에 섰던 (주)LS는 현재 한국거래소 예비심사 청구 중인 에식스솔루션즈의 상장 신청을 철회한다고 26일 밝혔다. 이해관계자들의 상장 추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주주보호 및 신뢰 제고를 위해서다.
이번 결정엔 중복 상장에 따른 주주 가치 훼손 논란과 정부의 부정적 기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관측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2일 더불어민주당 코스피 5000 특별위원회 오찬에서 "중복상장 문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이 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상황 속에 국내 지주회사들의 자금 조달 방식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국내 대기업들은 지주사 체제 전환 이후 유망한 사업부를 자회사로 분할하거나 기존 자회사를 상장시켜 대규모 자금을 수혈해 신성장동력 분야에 투자했다. 정부와 시장의 시각이 '주주 권익 보호'로 급격히 바뀌면서 이러한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투자시장에서는 HD현대로보틱스를 주목하고 있다. HD현대로보틱스는 2020년 5월 그룹 지주사인 HD현대(당시 현대중공업지주)의 로봇 사업부문이 물적 분할하면서 출범했다. 현재 HD현대는 HD현대로보틱스 지분 약 81.82% 갖고 있다.
최근 IPO 대표 주관사를 선정한 HD현대로보틱스는 본격적인 상장 채비에 나서고 있었다. 회사는 로봇 사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규모 설비 투자와 R&D 자금을 IPO를 통해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HD현대로보틱스 상장을 위해선 시장의 공감대가 우선 형성돼야 했다. 지주사 HD현대의 소액주주들이 핵심 신사업인 로봇 부문을 별도 상장할 경우 지주사 기업 가치가 중복 계상(Double Counting) 할인으로 훼손될 것이라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핵심이 지주사 가치 제고와 주주 환원에 맞춰져 있다는 것도 HD현대에겐 부담이다. 한국거래소도 지주사 주주들에 대한 보호 대책이 미흡할 경우 승인을 내주기 어렵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회사 경영진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현재 글로벌 로봇 시장은 산업용에서 협동 로봇, 나아가 휴머노이드로 급격히 확장되는 변곡점에 있다. 국내 1위인 HD현대로보틱스가 글로벌 티어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수천억원 단위의 선제적 투자가 필요하다.
고금리 기조 속에서 회사채 발행은 이자 비용 부담이 크고 지주사의 직접 증자 역시 주주들의 반대로 쉽지 않다. IPO가 최선의 대안이었으나 중복 상장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면 투자 시기를 놓칠 수 있다.
중복 상장 이슈가 크게 불거지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HD현대에서 차지하는 로봇 사업 매출 비중이 0.3%에 불과하고 조선·건설기계 중심의 계열사들과 사업 구조도 접점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HD현대로보틱스가 상장을 추진하기 위해선 기존과는 다른 주주 보호 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란 시각이 많다. 자회사 상장 시 모회사 주주들에게 신주인수권을 부여하거나 상장 후 발생하는 구주매출 대금을 지주사 주주를 위한 특별 배당이나 자사주 소각에 활용하는 식의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HD현대로보틱스 관계자는 "IPO 추진 관련 모회사 주주가치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시장과 적극 소통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