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봐도 길이가 다른 세 막대 A, B, C를 선생님이 칠판에 그린다. 교실에는 나와 함께 수십명의 학생이 있다. 내 눈에는 A가 가장 짧아 보인다. 셋 중 어떤 것이 가장 짧은지 선생님이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첫번째 친구는 ‘A’가 아니라 ‘B’라고 답한다. 나는 깜짝 놀란다.
이후에도 계속 같은 반 친구 모두가 ‘B’라고 얘기한다. 드디어 내가 답할 순간이 왔다. 고민은 깊어진다. 내가 잘못 보는 건가, 망설이다 결국 나도 ‘B’라고 답해버렸다. 1955년 애쉬(S. Asch)가 한 동조(conformity) 실험 얘기다. 강제적인 수단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다수의 의견을 쉽게 따른다는 것을 보여준 고전적인 실험이다.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도 떠오른다. 놀라운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은 임금이 시내를 행진한다. 이 마법 옷감은 비밀이 있다. 바로 구제불능 멍청이는 옷을 볼 수 없다는 거다. 행진을 보는 사람은 아무 옷도 입지 않고 벌거숭이로 걸어가는 임금에게 정말 멋진 옷이라며 갈채를 보낸다. 다른 이에게 멍청이로 보이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임금을 보면서 어떤 이는 심지어 헛것을 보기도 한다. “와, 하늘하늘 저 얇은 옷 정말 멋지군.”
우리는 이처럼 다른 사람과 쉽게 동조하는 사회적인 존재다. 동조현상은 좋고 나쁘고를 나눌 수 없는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다. 나와 같은 생각인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달으면 개인은 용기를 내 목소리를 높인다. 광장에 함께 모인 다수는 집안에서 혼자 울분을 삭이는 같은 수의 사람에 비해 훨씬 더 큰 힘을 가져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변혁시키기도 한다. 수많은 우리가 함께한 얼마 전 광화문 광장 얘기다.
하지만 우리가 동조현상을 걱정해야 할 때도 많다. 애쉬의 실험과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에서처럼 자기의 생각과 다른데도 스스로의 목소리를 낮춰 무조건 다수를 따르는 것은 문제다.
사람들이 ‘함께지성’을 잘 만들어내려면 ‘동조’를 경계해야 한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이유는 그 많은 사공이 결국은 모두 동의해 산 쪽으로 노를 저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생각을 버리고 다른 이의 의견에 눈을 질끈 감고 모두가 동조하면 함께지성의 결과는 왜곡된다. 사이버 여론 조작으로 얼마 전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4년형이 확정됐다. 점점 커가는 온라인 공간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런 불법적인 시도가 앞으로는 없으리라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바로 ‘벌거벗은 임금님’의 솔직한 아이처럼 내 생각과 다르면 가만히 있지 않고 무엇이라도 말하는 거다. 댓글 부대에 대처하는 길은 더 많은 댓글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38호(2018년 5월2~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청계광장]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가는 이유
김범준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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