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가 실물로 옮겨가면서 금융권을 중심으로 비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정부와 한국은행 등에서 돈을 풀어도 자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로 인해 은행과 증권사 등 돈의 유통을 담당하는 금융사들의 어려움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중 은행과 증권사의 사정은 또 다르다. 연기금과 정부가 주주로 포진한 은행들이 정부의 선제적인 지원대상으로 거론되는 반면 증권사들은 상대적으로 주인이 분명한 탓에 스스로 난국을 헤쳐 나가야 한다. 증권사의 수익 기반이 되는 천수답 증시도 문제이고 또 다른 수익원이었던 펀드 판매도 신통치 않은 수준을 넘어 얼어붙었다.
증권사들은 임원 연봉을 깎고 일부 명예퇴직까지 강행하는 등 사즉생의 각오를 밝히고 있지만 상황이 희망적이지만은 않다.
이런 가운데에서 사선을 넘고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겪은 끝에 자수성가로 증권업을 일군 노장들의 사례가 눈길을 끈다. 양재봉 대신증권 명예회장과 원국희 신영증권 회장이 그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4전5기의 신화를 쓰기도 했고 맨손으로 시작해 샐러리맨의 신화를 썼다. 그들도 물론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상태다. 원 회장과 양 회장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이들이 일군 회사와 증권업의 미래를 살펴봤다. 먼저 원 회장부터 보자.
◇참전 학도병 → 단골 숙직 → 금융사 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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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회장과 신영증권에게는 37이라는 숫자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본래 지난 1956년 설립된 회사인 신영증권에 원 회장이 지인들과 함께 대주주 겸 임원(전무)으로 들어간 것이 1971년이다. 그가 38세 때의 일이다. 원 회장은 그 뒤로 1974년 부사장, 1980년 사장을 거쳐 1987년부터 회장으로 재직해 오고 있다. 40대 초반 오너 겸 사장이라는 직장인의 꿈을 이룬 것이다.
정주영 현대 회장 같은 창업형 오너는 아니지만 그의 삶도 전쟁(6.25)을 거치며 사선을 넘나드는 경험, 그리고 생활고와 맞닿아 있다. 외부 활동을 극도로 자제하는 그이지만 지인들과 회사 임직원들에게는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한다.
원 회장은 10대 후반의 나이이던 1950년대 초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총탄이 넘나드는 참호 안에서 몇초 전까지 고향 얘기를 함께 하며 살을 맞댔던 전우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기도 했고, 얼어붙은 주먹밥을 몇차례에 걸쳐 씹어(아니 녹여) 먹기도 했던 기억도 있다. 실제로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인천ㆍ경기지역 학도병들의 충혼탑에는 ‘원국희’(元國喜) 세글자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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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결국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를 하게 됐다. 떠꺼머리 고등학생은 삶의 극한을 너무나 일찍 맛본 20대가 된 것. 일자리가 많지 않은 시절에 취업이 잘 돼 인기 있던 상과 대학생으로 어엿한 사각모를 썼지만 이번에는 가난이 문제였다. 좌판을 매기도 했고 노점에서도 일하는 고학생이었다.
전후 전 국토가 초토의 땅으로 불리며 건설사가 인기 있던 시절이라 그는 1957년 대림산업에 취직했다. 14년간 그야말로 밤낮없이 일했다. ‘밤낮없이’는 평범한 말이지만 원 회장에는 그 의미가 각별하다. 당시 회사는 직원들에게 돌아가며 숙직을 시켰지만 젊은 사원들에게는 좁다란 회사 숙직실에 밤새 머물러야 하니 좀이 쑤시는 일이었다. 월급 외에 짭짤한 가욋돈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지만 대부분이 꺼렸던 것.
형편도 어렵고 출퇴근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고 싶었던 원 회장은 남들의 숙직을 도맡았다. 밤에 나가지 않으니 돈 쓸 일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착실히 돈을 모았고 의기투합할 선후배, 동료(대학 동기가 주축)들도 만났다. 원 회장은 대림그룹 내에 있던 증권사를 눈여겨보면서 증권업에 기회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신영증권을 함께 500만원 정도에 사들였다. 당시 돈으로 평범한 집 서너채를 살 수 있는 정도였으니 회사 하나값치고는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투명경영+고객신뢰+리스크관리=37년 흑자
인수 다음해부터 흑자를 냈다. 그 흑자는 37년간 이어졌다. 증권시장의 극심한 부침 속에서도 주주에 대한 투명경영, 고객으로부터의 신뢰, 직원간의 인화를 강조한 결과였다는 게 신영증권쪽 설명이다.
무리한 외형성장보다는 고객서비스가 우선이었다. 외환위기 직후에도 흑자를 냈고 증시가 다시 활황세로 돌아선 1999년 다른 증권사들은 지점 수를 늘리고 광고 공세를 펼 때 신영증권은 내실 다지기로 각인돼 있다. 고객 거래 정보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원격 백업센터’를 증권업계 최초로 설치했던 것.
증권사가 펀드 대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최근에도 펀드 모범 판매회사로 인정받고 있다. 금융감독원의 민원처리 평가에서도 신영증권이 증권업계에선 유일하게 1등급을 받았다.
신영증권은 2001년 주식약정 위주의 영업을 포기하고 자산관리 영업으로 전환한다고 선언했고 그 결과 영업 수익에서 위탁수수료 비중이 업계 평균 이하다.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 신세는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원 회장이 정부로부터 금융산업 발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시기도 이 즈음이다.
자회사인 신영투자신탁도 ‘가치투자’, ‘장기투자’의 철학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지켜온 회사다. 신영투신은 과거 SK글로벌 사태, 카드채 사태가 발생했을 때 펀드에 편입된 자산 중에서 관련된 자산이 하나도 없었을 정도로 위험관리에 철저한 회사로 알려져 있다.
마라톤펀드로 상징되는 꾸준함은 신영의 대표 상품이자 브랜드기도 하다. 100미터를 9~10초에 끊는 단거리선수의 폭발력보다는 2시간여 동안 꾸준히 100미터를 18~19초에 달려 42.195㎞를 주파하는 마라토너를 선택한 것이다.
지난해 중국이나 브릭스펀드 등으로 해외펀드 열풍이 불 때도 신영증권과 투신은 차분함을 유지했다. 한국과 중국, 일본 3개국의 저평가된 가치주식에 직접 투자하는 상품인 ‘한중일밸류주식형펀드’를 내세워 현지 자산운용사로부터 종목 선정에 대한 자문을 받아 직접투자가 이뤄지도록 했다. 해외펀드에도 신영의 색깔을 입힌 것이다.
원 회장의 아들인 원종석 대표는 오랜 기간 회사에서 일해 왔고 2005년부터 대표이사 직함을 맡고 있다. 최근의 경영에는 원 회장 외에 원 대표의 색깔도 묻어난다.
◇위기가 기회다…도약 준비 끝
원 회장은 수년 전부터 격변이 온다며 채권에 관심을 둘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서브프라임 사태, 글로벌 금융위기, 실물경기 침체 등의 파고 속에서 특유의 날카로운 인사이트를 드러낸 것. 원 대표도 사내외 회의석상에서 직원들의 건강과 안부를 먼저 물으며 위기에서도 직원 모두가 뒤쳐지는 이 없이 함께 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경쟁 지상주의와는 한발 떨어진 모습이다.
원국희 회장 스스로도 최근 일신상의 변화를 겪었다. 몇십년 동안 고사해 오던 6.25 참전에 대한 국가 유공자 자격 인정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과거 '나는 충분히 돈이 있으니 어려운 이들에게 혜택이 가야 한다'며 자격 인정을 고사해 왔지만 최근에이를 받아들였다. 도전과 수성이라는 현재 진형형 목표 외에 삶의 정리라는 또 다른 방점을 찍은 것.
회사 안팎에서는 신영의 내실 경영과 리스크 관리를 통해 도약의 발판이 마련됐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신영증권은 은행계 지주사 체제나 거대 운용사를 끼지 않고서도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데다 증권업의 위기가 거론되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비상(飛上)을 준비하고 있다. 위기에 대한 도전으로 함축돼 있는 원 회장의 삶은 신영증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