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아주 특별한 일출
해 뜨기 전, 산은 암흑이다. 넴루트 일출이 그렇게 유명하다고들 하는데, 날을 잘못 잡은 건지 가는 사람이 필자 혼자다. 터키 여행에서 나홀로 여행자에게 결코 권하지 않는 아나톨리아 접경 지역, 해발 2150m에 오르기 위해 섭외한 진한 피부에 흰 눈자위를 크게 뜬 운전자, 해 뜨기 전 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아무도 없는 키오스크…. 터키 내륙의 깊은 산 속, 한 새벽의 어둠은 집에서도 겁쟁이로 통하는 여행자를 주눅들게 하기 충분했다. 그렇지만 이곳 ‘아나톨리아’의 뜻은 ‘태양이 솟는 곳’. 두려움에 스스로를 원망하면서도 그 일출을 봐야겠다는 결심은 여전했다.
넴루트다으(넴루트산) 꼭대기는 거대한 무덤 유적이다. 우리에게 이름도 생소한 콤마게네 왕국의 안티오코스 1세(재위 BC 69~BC 34)가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으니 BC 1세기의 작품이다. 해발 고도 2000m가 넘는 산 위에 돌을 잘게 부숴 높이 50m, 지름 150m의 인공산을 만들어 마치 이 거대한 산 전체가 그의 무덤인 듯하다.
이제 해가 뜨려나 보다. 관리 직원이 나와 동쪽 테라스로 가라며 국립공원의 출입문을 열어준다. 손전등 없이 걷자니 시야가 전방 2m도 되지 않는다. 나무도 없는 붉은 바위산 꼭대기를 향해 나선형으로 난 램프를 올라가고 있다. 오른쪽은 낭떠러지고 왼쪽은 아마도 그 왕의 무덤일 것이다. 이내 램프가 끝났는데 사진에서 보았던 그 석상들이 보이지 않는다. ‘길이 끊긴 것인가?’, ‘여기까지 와서 그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일까?’
검은 하늘이 차츰 푸른색으로 변한다.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자기 색이 나오는 것이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으로 하얀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틈은 이내 붉은색을 품은 투명한 오렌지색으로 변하고, 드디어 하얗고 동그란 오늘의 해가 올라온다. 첩첩 보이는 아나톨리아의 산들, 강과 평야…. 일출에 정신이 팔렸다가 문득 끊겼던 길이 생각난다. 나무 데크는 더 이상 없지만 빛이 있으니 돌산의 나머지를 오를 수 있겠다. 떠오르는 해를 친구 삼아 산길을 기어오른다. 드디어 만나는 석상의 머리들! 빛을 흡수하는 어떤 방해꾼도 없이 빠르게 도착하는 해의 열기를 온전히 받고 있다. 타국의 어둡고 무서웠던 산길과 불확실한 초조함이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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넴루트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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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넴루트산 |
산, 아니 무덤 위에는 다섯개의 의자가 있다. 9m의 거대한 석상은 하나같이 얼굴이 없다. 지진으로 파괴되고 아래로 굴러 떨어진 두상을, 원래 몸의 위치와 매치해 앞쪽으로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는데 그 머리만 해도 높이 2m가 넘는다. 석상 하나가 60톤 정도라고 하는데, 주변에 이런 돌이 없으니 이 높은 산까지 어딘가에서 옮겨왔을 것이다. 그것도 3000년 전에!
그렇다면 석상은 누구를 나타내고 있나. 아폴론-미트라, 티케(콤마네게 다산의 여신), 제우스-오로마스데스, 안티오코스 자신, 헤라클레스-아르타그네스이다. 그 사이엔 왕권을 상징하는 사자와 독수리 상이 있다. 독수리는 제우스의 신물이자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메신저이기도 하니 왕이 이들과 나란히 앉은 것에서 그의 꿈을 짐작할 수 있다. 신이 되고 싶었던 왕은 이렇게 대공사를 치렀다. 독특한 점은 페르시아와 그리스 신화를 모두 수용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지리학적 특성과 통치자들의 혈통 때문에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두 나라 모두와 교역을 했다. 그 결과물로 석상의 얼굴은 그리스 풍이지만 모자나 의상 같은 스타일은 페르시아 풍이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터키’는 이미 그때부터 있었다. 그리스인이 살았었고, 로마였고, 페르시아 점령지였고, 투르크 지배 하에 있었던 터키가 여행의 종합선물세트인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
넴루트산에서는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다. 서쪽 테라스는 일몰의 장소다. 지는 해를 보며 와인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이 작은 이벤트여서 많은 사람들이 일회용 컵과 와인을 준비한다. 석상의 머리는 동쪽 테라스보다는 자유롭게 흩어져 있다. 왠지 일몰과 어울리는 구성이다. 한편 북쪽 편에는 석판의 잔해들만 남아있다. 그런데 아직도 석실에 이르는 입구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 안티오코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정말 그가 이곳에 잠들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지고, 2000년가량을 잊혀져 있다가 1883년에 그 존재를 드러낸 이 유적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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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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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와 콤마게네왕의 석상 |
안티오코스 왕은 전성기를 누리고 영면했다. 이후 콤마게네 왕국은 로마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이를 증명하듯 넴루트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로마시대 다리가 있다. 생각지 않은 곳에서 로마 유적을 보는 기쁨도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더 흥미롭다. 작은 나무들이 자라는 돌산은 끊임없이 돌가루가 흘러내리고, 깎아지른 절벽 위로는 특유의 청명하고 높은 하늘이 보인다.
아슬아슬한 곡예운전을 하는 운전사에게 마음을 의지하고, 손잡이를 잡은 팔에 핏줄이 선명해 질 때쯤 잠시 내린 곳에는 오래된 동굴이 있다. 돌무덤인지 벙커였을지 모를 동굴 앞에 있는 부조물은 헤라클레스와 콤마게네 왕이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뒤를 돌면 이곳의 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꽤 높이 올라와 있음을 알 수 있다. 벼랑 끝에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비석이 펼쳐진 마을을 굽어보고 서 있다.
이 오지에서는 어렵지 않게 목자를 만난다. 소나 양과 차가 좁은 벼랑길을 공유하며 내려오다 보면 한쪽 편은 계곡이다. 머리를 들어 산 정상 쪽을 보면 오래된 성벽이 보인다. 콤마게네 시대의 요새라고 한다. 산을 다 내려오면 현대에 지은 다리와 나란히 로마 다리가 놓여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에선 래프팅을 한다고 하는데, 물이 많을 땐 물살이 꽤 셀 것 같다. 카하타 시내 쪽으로 향하는 길에는 안티오코스의 아들인 카라쿠스의 무덤이 있다. 왕조가 기울어서일까. 산 위에 잠들어 신이 되고자 했던 아버지와 달리 그 아들은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한 듯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 이 말을 더해야겠다. ‘보는 만큼 알고 싶어진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뜻밖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한다. 여행 후 자료를 찾고 읽는 것은 누가 강요하지 않은 순수한 열정이다. 아니다. 여행이 강요하는 탐구의 욕구, 꽤 그럴듯한 ‘탐욕’이다.
● 여행 정보
▶한국에서 터키, 넴루트 가기
한국에서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터키항공 등 터키 이스탄불행 직항 비행기가 있지만 넴루트로의 직항은 없다. 보통 이스탄불에서 버스를 이용해 거점이 되는 여행지로 가서 넴루트로 가는 차편을 계약한다. 넴루트와 가장 가까운 버스 거점은 카하타다.
▶넴루트산 가기
카하타나 아드야만, 말라티아 등지에 있는 여행사나 숙소, 가이드들이 넴루트 투어를 운영한다. 한국인에게 유명한 여행지 중 넴루트와 그나마 가까운 곳이 카파도키아다. 이곳 현지 여행사들도 넴루트 투어를 활발히 운영하며 이동시간이 길어 1박2일 이상은 예상해야 한다.
넴루트산 입장료: 9리라
넴루트 투어
http://www.nemruttours.com
Ramazan KARTAS
투어 가이드
전화번호: +90536 873 05 34
< 음식 >
Mehmet Ustanin Yeri: 카하타 길거리에 있는 현지인들의 케밥집이다. 고기와 야채를 샌드위치처럼 싼 것을 두릅 케밥이라고 하는데 저렴한 가격으로 부담없이 먹을 수 있어서 좋다.
두릅 케밥 2리라
전화번호 725 56 35
< 숙소 >
Euphrat Hotel : 이 호텔 최대의 장점은 위치다. 넴루트산과 가장 가까이 있는 호텔로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http://www.hoteleuphratnemrut.com / 문의전화: 0416 737 21 75
/ [email protected]
Karadut Pansiyon: 친절한 운영자와 맛있는 아침으로 카하타에 있는 몇 안 되는 숙소 중 가장 평이 좋은 곳이다.
http://www.karadutpansiyon.net / 문의전화: 0 416 737 21 69
/ [email protected]
아드야만 숙소 예약 사이트: http://www.adiyaman.a-turkey.com
말라타야 숙소 예약 사이트: http://www.malatya.a-turkey.com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3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