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파가 몰린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 /사진=장동규 기자
인파가 몰린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 /사진=장동규 기자
지하에 신도시가 들어선다. 지하개발은 더이상 개발할 곳이 없는 지상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이다. 그 자체로 상업·문화적 기능을 갖춰 도시기능의 한 축을 맡는다. 이는 보행자 통행을 위한 지하도나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한 지하상가와 전혀 다른 공간이다. 최근 서울시의 광화문광장 지하화계획이나 강남 삼성역 지하도시 개발은 교통과 휴식공간, 역사재건이라는 의미에서 주목받는다. 도심 개발의 대안으로 떠오른 지하도시 프로젝트를 점검하고 안전문제 등을 살펴봤다. <편집자주>
[숨쉬는 지하, 열리는 공간] ②50년 역사 ‘지하상가’의 두 얼굴


5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하상가는 초창기 상인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다. 당시 높았던 소비자의 관심도 시간이 지나면서 주춤해졌다. 지속적인 리뉴얼과 인근 대형 쇼핑몰 등과의 연계로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된 곳이 있는 반면 시장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죽은 공간으로 전락한 곳도 적지 않다.

◆‘공간의 가치’ 살린 지하상가


지하상가는 1970~1980년대 차량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한 횡단보도 대체 통행로 등의 목적으로 지하도가 생기면서 조성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 기업들이 사업비를 투자하며 지하상가 건립에 앞장섰다. 이후 기부채납 형태로 지자체에 권리가 반환되면서 1990년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지하상가의 역할은 중요하다. 공간의 제한에 가로막힌 지상의 대체 역할을 맡고 통행로에 불과한 지하도의 효율성을 높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하철역, 복합 쇼핑몰 등과 연계된 지하상권은 시너지 효과를 내며 자영업자들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기도 한다.


지하공간을 적극 활용해 성공한 사례는 해외에도 많다. 대표적인 곳이 뉴욕의 로우라인과 캐나다의 언더그라운드 시티 등이다. 해당 지역은 민간 투자방식으로 대규모 자금을 수혈해 버려진 공간을 대형 쇼핑몰, 지하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로우라인은 4046㎡의 터미널 지하공간에 첨단장비를 도입해 3000가지 이상의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자연친화적 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언더그라운드 시티는 추위를 피하기 위한 용도로 개설됐지만 1700여개에 달하는 쇼핑몰, 영화관 등을 구축하며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새롭게 태어났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6년 현지를 방문해 서울의 지하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구상하기도 했다.

국내 지하상가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반포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역이다. 2012년 고투몰이라는 이름을 달고 리뉴얼된 이 지하상가는 현재 600여개의 점포가 자리잡은 국내 최대 지하 쇼핑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울고속터미널 지하상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이템의 단일화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약 65%는 의류다. 여기에 2017년 리뉴얼된 신세계백화점과 시너지를 내면서 의류 쇼핑의 명소로 입지를 다졌다. 중심가에는 의류 매장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았고 3개의 쉼터와 2개의 먹거리존 등 다채로운 공간으로 구성됐다.

코엑스몰도 지속적인 변화로 상권 활성화에 성공한 지하상가 중 하나다. 특히 2017년 별마당도서관의 개관 효과를 톡톡이 봤다. 도서관 조성을 위해 투입된 자금은 약 100억원이다. 이후 코엑스몰 입점 매장 방문객이 기존 대비 2배 이상 늘었고 그해 공실률은 0%를 기록했다.

임대문의가 붙어 있는 을지로 지하상가. /사진=장동규 기자
임대문의가 붙어 있는 을지로 지하상가. /사진=장동규 기자
◆시대 흐름 못맞춰 퇴락한 상가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 지하상가의 점포수는 2800개에 달한다. 이 중 을지로 지하상가(을지로 2·3·4구역, 시청광장, 을지로입구 등)는 약 450개다. 을지로지역은 대표적인 쇼핑거리인 명동을 끼고 있는데다 사무시설 등이 밀집해 서울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 중 하나다. 명동만 해도 일평균 유동인구가 150만명으로 추정될 정도다.


하지만 을지로 지하상가는 몰락의 계단을 밟고 있다. 기자가 최근 이곳을 찾았을 때도 유동인구는 많았지만 점포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을 보기는 힘들었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지하철 2호선 시청역 구내상가 점포의 월 임대료는 최소 85만원에서 최대 311만원이다. 같은 라인인 을지로입구역의 경우 최소 190만원부터 최대 5900만원까지 편차가 크다. 역 개찰구에서 멀어질수록 월 임대료 부담이 줄어들지만 동시에 유동인구도 줄어 텅빈 점포가 꽤 많았다.
유동인구가 뜸하다보니 노숙자들이 자리를 차지한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시청역에 가까워질수록 매장 곳곳에 ‘임대문의’, ‘점포정리’ 등의 안내문구가 붙어 있거나 횡급히 자리를 떠난듯 영업의 흔적이 일부 남은 텅빈 매장들도 보였다.

을지로입구역에서 나와 시청역까지 이어진 길을 이동하는 동안 거리는 제법 번화했지만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다. 인근 백화점, 명동 등에서 쇼핑객을 빨아들여 지하상가의 적막이 깊었다.

시청역 인근 지하상가에서 영업 중인 A씨는 “물건을 찾는 사람이 없어 장사가 잘 안 된다”며 “직원 급여도 제때 챙겨주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평일 오후 4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1시간 정도 현장에서 둘러본 을지로지하상가는 오가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물건을 구매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일부 상인들은 매장 내로 들어오는 손님이 없다보니 의자에 앉아 쪽잠을 청하고 있었다. 서울의 중심가에 자리를 잡은 ‘알짜 상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곳은 하나의 상권이라기보다 두개의 역을 이어주는 지하보도에 가까웠다.


지난 30년 동안 지하상가에서 잡화점을 운영했다는 B씨는 “30년 넘게 이곳에서 구두를 수제로 제작 판매하는 우리 가게는 단골 손님이 많아 장사를 이어오고 있지만 이곳 상가 대부분은 손님이 뚝 끊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B씨도 점포정리라고 크게 적힌 A4 용지를 점포 유리외벽에 붙여두고 있었다. B씨는 나이를 생각해 장사를 접으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말했다. 새로 입점하겠다는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B씨는 “간혹 새로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있어도 상권을 둘러본 뒤 계획을 철회하기 일쑤여서 장사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79호(2019년 2월12~1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