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양국 간 전쟁이 장기화되면 곡물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 역시 직격탄을 피할 수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래픽=일러스트레이터 임종철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양국 간 전쟁이 장기화되면 곡물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 역시 직격탄을 피할 수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래픽=일러스트레이터 임종철
◆기사 게재 순서
①“나부터 살자”… 곳간 잠그는 곡물 수출국들
②‘식량안보 낙제’ 꼬리표 떼지 못한 한국
③식량에 사료까지… 주요 곡물 수급 빨간불

전 세계의 이상기후, 자연재해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악재가 겹치며 식량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발생한 양국 간 전쟁이 장기화되면 곡물 수입의존도가 높은 한국 역시 직격탄을 피할 수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제적으로 불안정한 곡물 수급 상황이 지속되면 쌀을 제외한 대부분의 곡물은 국내에서도 수급 차질로 이어진다. 곡물 파동이 덮치면 식품업계는 단가 상승을 피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식량자급률이 낮아 식량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경고해 왔다.

곡물·식량 자급률, 식량안보지수까지 ‘하위’


한국 식량자급률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 회원국 중 최저 수준이다. /인포그래픽=김은옥 기자
한국 식량자급률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 회원국 중 최저 수준이다. /인포그래픽=김은옥 기자
한국은 세계에서 7번째로 곡물 수입이 많은 국가다. 한국의 곡물 자급률(사료용 포함)은 1970년 80.5%에서 2010년 27.6%, 2019년 21.0%까지 쪼그라들었다. 국내의 식량자급률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 회원국 중 최저 수준이다. 1970년 86.2%에서 2010년 54.1%으로 2019년에는 45.8%까지 곤두박질쳤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해 발간한 ‘곡물 수급 안정 사업· 정책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식량안보지수는 OECD 가입국 중 하위 수준이다. 식량안보지수는 인구 증가, 천재적 재난, 전쟁 등을 고려해 국가가 일정량의 식량을 확보하는 지수다. 아시아 주요국 중에선 2020년 기준으로 한국(29위·72.1점)은 일본(9위·77.9점) 싱가포르(20위·75.7점)보다 낮다.

식량자급률이 낮은 한국은 식량 안보가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식량 안보 전략을 수립하는 컨트롤타워 평가 지표인 ‘수입농산물 관세와 식량·안보 접근 정책’ 평가에서 한국은 2012년부터 2020년까지 9년 연속 0점을 받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식량자급률이 낮은 한국은 식량 안보가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사진은 우크라이나 키이우 지역의 밀 수확 장면. /사진=로이터
식량자급률이 낮은 한국은 식량 안보가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사진은 우크라이나 키이우 지역의 밀 수확 장면. /사진=로이터
이철호 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 명예이사장(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은 “쌀을 제외한 주요 곡물의 해외 의존도는 점점 심화되고 있어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취약한 식량 사정에도 국가적 노력과 국민적 관심이 낮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곳곳에서 식량 안보의 위험성 지표가 확인되고 있음에도 정부의 비축 제도가 약하다”며 “지난 10년간 소비자 반대에 부딪힌 유전자변형농산물(GMO)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며 생명공학 신품종을 개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식품산업은 곡물 파동이 시작되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곡물 수입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국제 곡물가격 상승 시 관련 국내물가 역시 오를 수밖에 없다.

치솟는 국제곡물가에 고개 드는 밥상물가 공포


곡물 수입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국제 곡물가격 상승 시 관련 국내물가 역시 오를 수밖에 없다. 사진은 우크라이나 키이우 지역의 밀 수확 모습. /사진=로이터
곡물 수입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국제 곡물가격 상승 시 관련 국내물가 역시 오를 수밖에 없다. 사진은 우크라이나 키이우 지역의 밀 수확 모습. /사진=로이터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24개 품목에 대한 국제가격 동향(95개)을 조사해 발표한 ‘2022년 2월 세계식량가격지수’(2014~2016년 평균 100포인트)는 140.7포인트로 전월 (135.4)보다 3.9% 상승했다. 1년 전인 2021년 2월(116.6) 보다 20.7% 높은 수치다.
올 2월 곡물 가격지수는 전달 (140.6)보다 3.0% 상승한 144.8포인트를 기록했다. 밀 가격은 주요 수출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수출에 어려움이 예상되면서 상승했다. 옥수수 가격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작황 우려, 밀 가격 상승, 우크라이나산 수출 불확실성 등의 영향으로 올랐다. 쌀은 일부 수출국 통화가치 상승과 동아시아 국가의 수요 증가로 가격이 뛰었다.

김지연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 해외농업관측팀 전문연구원은 “올 연말까지 상승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며 국제 곡물 가격이 3~6개월 후에 거래가 이뤄지는 선물가격이란 점을 감안할 때 국내 물가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한국은 많은 곡물을 수입한다. 밀의 경우 미국, 호주, 우크라이나 등 3개 국가에서 80%를 수입하고 있다. 식품업계는 대부분 3개월까지 비축분을 쌓아두고 있지만 장기적으론 국제 곡물가격 영향을 피할 수 없다는 시각이다. 러시아는 국내식음료 기업들의 직접 수입국은 아니지만 대표적 농산물 생산국인 만큼 간접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식품 업계 한 관계자는 “농산물 공급 여부와 국제 곡물가격 변동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터질 게 터졌다”… 식량빈국 한국, 비축량 낙제점


쌀 이외의 곡물은 국제시장에서 공급 차질이 발생할 경우 국내 수급 차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사진은 우크라이나 키이우 지역의 밀 수확 장면. /사진=로이터
쌀 이외의 곡물은 국제시장에서 공급 차질이 발생할 경우 국내 수급 차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사진은 우크라이나 키이우 지역의 밀 수확 장면. /사진=로이터
쌀 이외의 곡물은 국제시장에서 공급 차질이 발생할 경우 국내 수급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 밀과 콩 등의 식용 곡물은 쌀 다음으로 소비가 많지만 국내산에 대한 생산 소비 기반이 미흡한 상황이다. 한국은 곡물 수입 중 밀·콩·옥수수 등 3대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95%에 달한다. 2019년도 기준 국내 곡물 수요량 2104만톤 중 1611만톤 (76.6%)을 수입에 의존한다. 최근 5년간 쌀의 자급률은 92~105% 수준으로 높지만 밀·콩·옥수수 등 다른 식량작물의 자급률은 0.5~9.4% 수준에 그친다.
식량 확보가 안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로 국제 공급망이 흔들리면 한국 농식품 산업은 큰충격을 받아 결국은 물가 상승을 초래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식량 비축과 공급체계 점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석윤 농협구미교육원 교수는 “한국의 곡물·식량 자급률은 매우 저조하며 정부 차원에서 장기 플랜을 마련하지 못해 쌀이외 품목들에 대한 대응책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윤종철 국립식량과학원장이 지난 17일 농촌진흥청에서 ‘국산밀재배품질관리지원단 운영과 밀 자급률 향상을 위한 기술적 대응전략’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농촌진흥청
윤종철 국립식량과학원장이 지난 17일 농촌진흥청에서 ‘국산밀재배품질관리지원단 운영과 밀 자급률 향상을 위한 기술적 대응전략’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농촌진흥청
앞서 정부는 ‘2018~2022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발전 계획’을 통해 식량자급률 목표치를 정했다. 2022년 까지 밀은 9.9%가 목표였으나 2019년 기준 실적은 0.7%에 불과했다. 45.2%를 목표로 세운 콩은 2019년 기준 실적은 26.7%에 그쳤다. 옥수수 역시 목표치(8.2%)에 턱없이 부족한 3.5%에 머물렀다.
최지현 GS&J 시니어이코노미스트(전 한국농촌경제연 구원 부원장)은 “국제 곡물의 수급 상황이 급격히 변화할 경우 외부적 충격에 굉장히 취약한 구조”이라며 “쌀을 제외한 비축물량을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 국산밀재배품질관리지원단은 2025년까지 국산 밀 생산단지 확대 조성과 성공적 정착을 위한 기술적 지원에 나설 예정이다.

윤종철 국립식량과학원장은 “국산 밀 품질 경쟁력 확보와 재배면적 확대를 위해 연구·개발 역량을 집중하고 밀 생산단지에 관한 현장연구와 기술지원을 강화해 밀 자급률 향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