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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26일. 대구 달서구에서 어린아이 5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1991년 3월26일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선거날이었다. 이날 오전 8시쯤 대구 성서국민학교에 재학 중이던 우철원군(13), 조호연군(12), 김영규군(11), 박찬인군(10), 김종식군(9) 등 5명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조호연군 집 앞에 모여 놀고 있었다. 이때 조군 집에서 세를 들어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시끄러우니 나가서 놀아라"라고 핀잔을 줬다.
아이들은 놀거리를 찾던 중 도롱뇽알을 채집하기로 결심했고 집으로 돌아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은 후 다시 모였다. 이후 마을 뒷산인 대구 달서구 와룡산을 올랐다. 와룡산은 해발 300m 고지의 완만한 지형을 이룬 산이다.
오전 9시쯤 투표를 일찍 마친 김순남씨는 학교 쪽에서 내려오던 도중 와룡산 쪽으로 향하는 아이들을 목격했다. 오전 11시30분쯤 같은 학교에 다니던 함승훈군은 다른 무리의 형들과 와룡산을 찾았고 홀로 중턱에 있는 무덤가까지 올랐다. 함군은 산 위쪽에서 10초 간격의 날카롭고 다급한 비명을 두 차례 들었다. 훗날 성인이 된 함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였다"고 밝혔다.
오후 6시쯤 아이들의 부모들은 점차 해가 지는 와중에도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주변을 샅샅이 뒤졌고 오후 7시30분쯤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은 대부분의 인력이 선거 투표장에 동원됐기 때문에 여유가 없어 도와주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했다. 또 아이들의 실종을 가출로 단정 지은 후 수사를 늦추고 말았다. 이후 다음날 오전 3시까지 산을 뒤졌지만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등산객에게 발견된 아이들… 11년 만에 가족 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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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에도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5명의 아버지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트럭을 구매해 전국을 다니며 전단지를 뿌리는 등 실종된 아이들의 행방을 찾았다.
아이들은 언론을 통해 도롱뇽이 아닌 개구리를 잡으러 가다 실종된 5명의 아이들로 알려지면서 '개구리 소년'으로 불렸다. 1991년 5월5일 노태우 대통령은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군과 경찰에 동원령을 지시했다. 같은해 10월24일 대구 지역 군경 수천명이 동원됐지만 아이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1996년 어느 날 범인을 알고 있다는 범죄심리학 전공 카이스트 교수 김모씨가 등장했다. 김 교수는 실종된 김종식군의 아버지 김철규씨가 아이들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김 교수의 어이없는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김종식군 집의 욕실, 방 등 땅을 1m 이상 파고 수색 작업을 펼쳤다. 김철규씨는 수색현장을 묵묵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김 교수는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카이스트로부터 해고당했다.
사건이 세간에서 점차 잊혀지던 2002년 9월26일 와룡산을 오르던 한 등산객은 도토리를 줍기 위해 풀숲을 뒤졌다. 이때 뼈다귀와 옷가지를 발견해 잡아당겼고 유골을 발견하자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을 통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아이들의 신원 확인을 위해 현장에 모였고 땅속에 파묻힌 유골, 신발, 옷 등을 본 후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실종된 아이들을 11년 만에 마주한 순간이었다.
33년 지났지만 실마리 못 찾아… 경찰 조사 미흡 '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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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발견됐음에도 사건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다. 실종 당시 수색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1년 동안 약 30만명이 동원됐는데 단일 실종 사건으로 역대 최대 규모였다. 이렇게 많은 인력이 투입됐음에도 11년이나 지난 후 도토리를 줍던 등산객에 의해 아이들이 발견됐다는 점에서 많은 이가 의구심을 품었다.
경찰 조사 과정이 미흡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장소는 와룡산 새방골이다. 아이들이 처음 오른 곳으로 추정된 불미골과는 다소 떨어진 지역이다. 경찰 등은 불미골을 집중해서 수색했고 새방골은 수색 집중 지역에 해당하지 않았다.
실종 당일인 1991년 3월26일 기온은 3도에서 12도 사이였으며 오후 6시부터 약 5㎜의 비가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사건 담당 경찰은 아이들이 발견된 후 사인을 저체온사로 추정했다. 부모들은 경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신변에 문제가 없었다면 비를 확인한 후 스스로 산에서 내려왔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2002년 11월12일 아이들의 두개골을 조사한 법의학팀은 아이들이 타살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우철원군의 두개골에 예리한 사각형 모양의 인위적으로 생긴 구멍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사팀은 범행 도구와 관련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2004년 3월26일 부모들은 아이들의 사인을 알기 위해 장례식까지 미뤘지만 끝내 어떠한 결론도 얻지 못한 채 아이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2006년 3월25일 사건 발생 15년이 되던 해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하고 사건의 공소 시효가 만료됐다.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은 33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부모들은 지금도 범인을 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