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출처: 人民??, 1967,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66년 5월 16일, 중국 사회는 5·16 통지와 함께 문화대혁명의 격랑에 휩싸였다. 마오쩌둥 주도의 이 운동은 낡은 문화와 사상 타파, 사회주의 혁명 심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중국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위가 실추된 마오쩌둥은 당내 비판 세력 제거와 권위 재확립, 혁명 세대 계승을 위해 문화대혁명을 구상했다. 당시 중국 사회 내부의 관료주의, 특권 의식 문제 해결과 젊은 세대의 혁명성 고취 또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내 권력자' 타도와 '프롤레타리아 문화' 건설이라는 운동의 목표로 제시됐다.


문화대혁명은 전국으로 확산했다. 마오쩌둥의 호소에 호응한 학생들은 홍위병을 조직, '사구'(四舊) 타파를 외치며 학교, 기관, 개인의 집을 습격하고 파괴했다. 지식인, 예술가, 관리는 '반혁명 분자'나 '수정주의자'로 몰려 박해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당과 정부 조직은 마비되고 사회 질서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홍위병 간 무력 충돌이 빈번했으며, 생산 활동 위축과 경제 침체가 발생했다.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 당내 실력자들은 숙청됐고, 린뱌오와 장칭을 중심으로 한 문화대혁명 지도부의 권력은 강화됐다.

1969년 4월, 제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문화대혁명의 '승리'가 선언됐으나 사회적 혼란은 지속됐다. 린뱌오 쿠데타 시도 및 사망, 저우언라이 복권 시도 등 정치적 사건들이 이어졌다. 마오쩌둥 사후인 1976년 10월, '4인방' 체포로 문화대혁명은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수많은 인명 피해와 정신적·육체적 상처, 지식인 사회 붕괴, 사회 구성원 간 불신 심화, 경제적 손실, 문화유산 파괴 등이 발생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후 문화대혁명을 '10년의 내란'으로 규정하고 과오를 인정하며 개혁개방 노선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