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아편전쟁을 풍자한 삽화. (출처: Jean-Jacques Grandville, 1840,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839년 6월 3일, 광둥성 후먼 해변에서는 중국 관리 임칙서의 지휘 아래 엄청난 양의 아편이 바다에 버려졌다. 이는 중국의 아편 무역 근절을 위한 단호한 조치였으나 동시에 제1차 아편 전쟁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 동인도회사는 중국으로부터 차, 비단, 도자기 등 막대한 양의 물품을 수입하며 엄청난 무역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자급자족 경체 체제였기 때문에 서구의 상품에 대한 수요가 적었다. 이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영국은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아편은 강력한 중독성으로 인해 중국의 수많은 인민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청나라 도광제는 아편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1838년 임칙서를 광저우로 파견해 아편 무역을 근절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임칙서는 부임 직후 외국 상인들에게서 압수한 약 2만 상자(약 1400톤)의 아편을 후먼 해변에서 폐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영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상인들은 자신들의 재산권이 침해당했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영국 정부는 자유무역의 원칙을 위협받았다고 주장하며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했다. 영국 내에서는 아편 무역의 비도덕성에 대한 논쟁도 있었으나, 결국 상업적 이익과 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대의가 우선시됐다.

1840년 6월, 영국 해군 함대가 중국 해안에 도착했다. 영국군의 최신식 무기에 청나라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청나라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1842년 난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홍콩 할양, 5개 항구 개항, 막대한 배상금 지불, 영사 재판권 인정 등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1차 아편 전쟁은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는 청나라의 몰락과 서구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투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중국은 수많은 불평등 조약과 서구 열강의 침탈에 시달리는 비극적인 역사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