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으로 붐비는 서울 인사동 한복판에는 독특한 복합문화공간 쌈지길이 있다. 도자기·섬유·금속·목공 등 자영업 공예숍이 모인 이 건물은 인사동의 상징 같은 존재다. 2016년 이지스자산운용이 820억 원을 들여 인수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프로젝트를 이끈 조갑주 대표는 이 자산을 "임차인과 임대인이 함께 가치를 키우는 상생형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이지스는 인수 초기 주변 시세보다 낮은 임대료를 적용하고 매출과 연동해 수익을 나누는 방식을 도입했다. 임대료를 최대한 끌어올리기보다 장사가 잘되는 임차인을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이 건물의 가치를 높인다는 판단이었다. 단기 수익보다 공간의 지속성과 사람의 가치를 우선한 실험이었다.
오늘날 기업은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특히 금융사는 공공성과 중요성이 큰 만큼 사회적 책임 이행은 신뢰도와 자금 조달, 인재 확보, 나아가 장기 성장의 토대가 된다. 지속 가능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불거진 이지스자산운용의 여러 매각 잡음은 가볍지 않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중국계 사모펀드(PEF) 힐하우스가 한화·흥국생명을 제치고 선정되자 국부유출과 사회적 책임이 뒷걸음질 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연기금 등 공적자금으로 성장한 국내 최대 운용사가 외국계 사모펀드로 넘어가는 것이 단순한 지분 거래로 끝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이지스는 업계 최고, 최대 인력을 보유한 운용자산 국내 1위, 아시아 3위권 토종 부동산 운용사다. 2010년 설립 후 6~7년 만에 업계 정상에 오른 고속성장 배경에는 시장의 신뢰가 있었다. 그 신뢰의 핵심축이 바로 국민연금이다. 연기금이 이지스 펀드에 출자한 자금은 현재 6조 원 규모, 이 중 국민연금 몫만 2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국민연금 전체 부동산 투자의 약 4% 규모다.
국내 최대 큰손(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은 천문학적인 총자산(1360조원) 규모와 안정성을 바탕으로 다른 투자자들에게 일종의 보증 역할을 한다. 이지스가 빠르게 몸집을 불릴 수 있었던 배경이자 사회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최근 국민연금이 이지스의 매각 과정에서 펀드 출자금 회수 검토 등 고강도 카드를 꺼내든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된다.
물론 모든 사모펀드가 단기 이익만을 좇는 건 아니다. 그러나 홈플러스·롯데카드(MBK파트너스) 등 국내외 기업, 금융사를 막론하고 사모펀드 인수 이후 비용 절감과 자산매각을 통한 단기성과 압박이 반복돼 온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시장은 묻는다. 이지스가 쌈지길에서 보여준 '상생형 운용'의 철학이 매각 이후에도 유지될 수 있느냐고.
평가는 갈리지만 이지스는 2010년 중반 이후 다양한 실험적 상생형 투자를 시도해 왔다. 제2의 쌈지길 프로젝트로 불린 신사동 가로수길(가로골목)을 비롯해 성수동, 연남동·합정동 등 상업시설에서 장기 영업을 전제로 임대료 부담을 낮춘 게 대표적이다. 올해부터 사회공헌 예산을 두 배로 늘린 것도 같은 흐름이다.
이지스 매각 논란의 본질은 결국 가격이 아니다. 쌈지길 같은 회사가 쌓아온 신뢰와 사회적 책임 모델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느냐다. 단기 수익만 좇는 금융사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지속 가능성과 포용, 상생이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다. 토종 1위 금융사 이지스가 남긴 쌈지길 실험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지금 시장이 이지스 매각을 유독 예민하게 바라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