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조선 후기 최고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는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바라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글씨를 쓴 이를 두고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양녕대군의 글씨체라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힘차고 강기 있는 서체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듯 양녕대군 후손인 이승보가 고종 2년(1865년) 경복궁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았을 때 이 글씨의 탁본을 양녕대군의 사당인 서울시 상도동 지덕사에 보관했다. 이는 2008년 방화로 손상된 현판을 복원할 때 중요한 고증자료로 활용됐다.
![]() |
/사진=이미지투데이 |
◆숭례문의 수난과 중수
2008년 2월10일 화재가 발생하기 전까지 숭례문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동란 등 전란이 있을 때마다 부분적으로 훼손됐다. 또 1907년 10월26일에는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가 한양을 방문한다며 북쪽 성벽을 헐었다. 실권을 장악한 일제의 통감부가 한성을 상징하는 남대문을 훼손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위신을 뿌리째 도려낸 것이다.
태조 7년(1398년)에 완공된 숭례문은 35년이 지난 세종 15년(1433년) 풍수지리설에 어긋난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세종은 숭례문 주변의 지대가 낮아 우백호의 기능이 약하다고 여겨 인왕산과 남산의 지맥을 연결해 그 위에 성문을 다시 지으려 했다. 하지만 당시 수많은 공사로 물자가 달려 14년 후인 세종 29년(1447년)에서야 착공했고 그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년) 3월17일 완공됐다.
그 후 30년이 지난 성종 9년(1478년)에는 성문이 기울어졌다며 숭례문을 수리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이뤄졌고 다음해인 성종 10년(1479년) 4월2일 보수가 끝났다. 이 두차례의 중수 사실은 1962년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에서 확인됐다. 즉 불타기 전의 남대문은 태조 때 지은 게 아니라 세종 때 지은 것을 성종 때 보수공사한 건물이다.
숭례문에서 소의문 옛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어림잡아 600m쯤 된다. 1907년 숭례문 북쪽으로 맨 처음 성곽이 헐린 구간이다. 왕복 10차선 넓은 남대문로를 건너 대한상공회의소로 가다 보면 인도의 길바닥에 성곽이 지나간 자리를 표시한 판석이 깔려 있다. 그런 판석은 대개 복원이 불가능한 구간에 깔아놓는다.
지금 대한상공회의소 본관자리는 일제강점기에 남대문소학교가 있던 자리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남대문 주변은 대체로 일본인 거주지가 됐고 일본인 거류민단이 조직돼 그들을 위한 소학교를 건립한 것이 남대문소학교다.
◆칠패시장과 남대문시장
대한상공회의소 경계에 도착하기 전 우남빌딩 앞 보도에서 ‘남지’(南池)라는 표지석이 눈에 띈다. 조선시대 관악산의 불기운을 끄기 위해 팠다는 연못이다. 이곳은 당쟁이 심할 때 남인(南人)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해서 조선중기 남인의 집권을 막기 위해 반대파세력이 남지를 메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못을 다시 복원하자 현종 때 남인 허목(許穆)이 득세했고 정조 때는 남인 영수 채제공(蔡濟恭)이 집권했다는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과 연관돼 전해왔다.
남지 표석을 지나면 바로 칠패길이다. 칠패길은 조선후기 이곳에 형성된 칠패시장이 있었기에 생긴 도로명이다. 칠패지역은 남대문 염천교 중림동 일대(현재 서소문공원)의 지역을 말한다. 칠패시장은 상공회의소 앞에서 염천교 쪽으로 나가는 중구 봉래동 부근의 어물시장을 일컬었다. 지금의 중림시장 자리다. 칠패시장은 종루(종로사거리), 이현(흥인지문 안)과 더불어 조선후기 도성의 3대 시장의 하나로 꼽혔다.
칠패(七牌)는 지명이 아니라 이 구역의 수비를 맡았던 금위영 소속 7패부대, 즉 7번째 순찰구역을 담당했던 단위부대를 말한다. 조선후기 군제는 도성방위를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이 분담했다. 영조 27년(1751년) 군영의 배치도를 보면 돈의문에서 숙정문까지는 훈련도감, 숙정문에서 광희문까지는 어영청, 광희문에서 돈의문까지는 금위영이 맡았다.
남대문시장은 1897년 1월에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다. 조선 초에는 그 자리에 상평창(常平倉)이 있었다. 상평창은 물가를 조절하던 기관이었는데 물가가 내릴 때는 생필품을 사들였다가 오르면 싼값에 팔았다. 17세기에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그것은 대동미(大同米)와 대동목(大同木) 등의 출납을 맡아보던 선혜청(宣惠廳) 창고로 바뀌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조세금납화조치(租稅金納化措置)를 실시함에 따라 현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자 이 창고를 상인들에게 내주며 시장으로 삼았다. 남대문시장의 상품은 주로 마포·용산·서강 등의 포구로 들어오는 물자였다. 일제강점기 남산 밑 회현동 필동일대에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면서 그들은 빠르게 남대문시장의 주도권을 잡았다.
☞인왕산 성곽 답사길
숭례문→대한상공회의소와 퍼시픽타워→옛 서소문 터→옛 배재학당 터→ 러시아대사관→정동제일교회→이화학당 터(이화여고 교내)→창덕여중(옛 프랑스공사관 터)→창덕여중 뒷담→문화일보 주차장(도성의 성곽이 지나간 옛 동양극장 자리)→옛 돈의문 터→경교장→서울시교육청→옛 기상청→월암근린공원→배설 옛집 터→홍난파 옛집→사직터널 위(태조 때 돈의문 터)→ 인왕산 남쪽 성곽→ 인왕산 정상→인왕산 북쪽 성곽→인왕산스카이웨이→윤동주문학관→청운공원(옛 군인아파트 터)→수성동계곡→인왕산스카이웨이→창의문
☞ 본 기사는 <머니S> 제510호(2017년 10월18~24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