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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대신 우리말을 사용하자는 지적에도 아파트 단지와 방송, 상점 간판에 이르기까지 외국어 사용이 줄지 않고 있다. 사진은 외국어 간판이 즐비한 2018년 10월 서울 중구 명동 거리의 모습. /사진=뉴스1 |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한글문화연대의 외국어표현 이해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외국어단어 3500개 중 전체 응답자의 60% 이상이 쉽게 이해하는 단어는 30.8%(1080개)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이 외국어 표현에 익숙지 않은데도 외국어가 곳곳에서 흘러넘치고 있다는 의미다.
'경로당=SENIOR CLUB'?
… "한글보다 영어가 더 고급스럽지"![]() |
인터넷 쇼핑몰에서 제품명이나 제품 소개에 영어를 사용하는 사례가 많다. 사진은 모 쇼핑몰들에서 제품 분류와 설명을 영어로 표기한 모습. /사진=인터넷 쇼핑몰 캡처 |
인터넷 쇼핑을 하던 김민지씨(여·27)는 처음 보는 단어를 접했다. 아더 컬러? 모르는 색의 이름인가 싶어 검색해본 김씨는 쇼핑몰에서 말하는 아더가 'other'(다른)임을 알고 실소를 터뜨렸다. 해당 쇼핑몰에는 '프론트 중앙의 우드 단추', '톤 다운된 빈티지한 색감', '센슈얼한 무드 연출' 등 영어 표현을 남발하고 있다.
지난해 말 이사를 마친 누리꾼 A씨는 아파트의 주요 시설이 영문으로만 표기됐다고 지적하며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A씨에 따르면 부산의 한 신축 아파트는 관리사무소를 'Management office', 경로당을 'Senior club', 도서관을 'Library'로 표기했다. 한글 명칭이 같이 병기되지도 않았다. A씨는 "노인들이 'Senior club'이 경로당인 걸 어떻게 알겠냐"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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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보다 영어가 고급스럽고 세련됐다는 인식 탓에 아파트 단지명과 아파트 내 시설에도 영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서울 은평구의 한 아파트에서 주민생활시설 및 스포츠시설이 위치한 건물을 CASTLIAN CENTER와 SPORTS로, 경로당을 SILVER CLUB으로 표기한 모습. /사진=박현주 기자 |
각종 상품이나 아파트단지, 상점 간판 등에서의 외국어 남용은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외국어가 우리말보다 세련되거나 고급스럽다는 인식이 많아서다.
권재일 한글학회 회장은 외국어로 상품·상호명 등을 짓는 이유에 대해 "우리말보다 외국어로 이름을 지어야 상품이 더 잘 팔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외국어로 이름을 짓는 회사를 옹호할 뜻은 전혀 없지만 이들만 나무랄 건 아니다"며 "소비자들이 우리말보다 외국어를 고급스러운 것, 멋있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기업이 소비자의 선호에 맞추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미 위해 영어 신조어 남발"… TV 속 '콩글리시' 눈살
영어는 방송가도 점령했다. 최근에는 리버뷰, 오션뷰, 다이닝룸, 키즈룸, 드레스룸과 같은 영어 표현을 미디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셀럽, 아티스트, 라이징스타, 비하인드, 스포일러 정도는 이미 방송가에 정착한 지 오래다.
권 회장은 시청자들의 외국어 선호가 방송가의 외국어 남용 원인이 된다고 진단했다.
권 회장은 "예컨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영어 접미어 –er을 붙여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에 시청자들이 재미를 느끼니 방송의 언어와 자막에 유사한 사례가 계속 노출되는 것"이라며 "언택트처럼 영어도 우리말도 아닌 이상한 신조어가 어디 한둘이냐"고 지적했다.
그는 "시청자들이 외국어의 오·남용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방송에서도 외국어 사용을 포기할 것"이라며 "시청자들이 우리말과 글에 자긍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방송에서는 '프로방콕러'(전문가를 뜻하는 접두사 pro를 붙여 방에 자주 콕 박혀있는 사람을 의미), '뇌피셜'(뇌+official의 합성어로 뇌에서 나온 공식적인 생각을 의미) 등 실사용되는 외국어표현뿐 아니라 이를 우리말과 접목시킨 신조어를 마구 양산하고 있다.
실제로 방송에서는 '프로방콕러'(전문가를 뜻하는 접두사 pro를 붙여 방에 자주 콕 박혀있는 사람을 의미), '뇌피셜'(뇌+official의 합성어로 뇌에서 나온 공식적인 생각을 의미) 등 실사용되는 외국어표현뿐 아니라 이를 우리말과 접목시킨 신조어를 마구 양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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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대 국어문화원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약 82%가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로 인한 스트레스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료=상명대 국어문화원 |
권 회장은 "(외국어 남용) 현상이 방송 프로그램 안에서만 그치면 좋겠지만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 속에 스며들어 널리 번져나가는 것이 문제"라며 "세대와 계층 사이 의사소통을 어렵게 하는 세태가 확산되면 한국어는 의사소통의 기능을 잃고 결국에는 언어의 자격까지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언택트? 팬데믹?… 고령층, 코로나19 속 ‘까막눈’
재난이 닥쳤을 때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안타깝게도 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 속을 사는 고령층에게는 이미 현실이다.
앞서 언급한 문체부 조사에 따르면 70세 이상 고령 응답자의 외국어표현 이해도는 28.4점(100점 만점)에 불과했다. 전체 연령 평균 이해도가 61.8점인 것을 고려하면 고령층이 외국어 표현을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가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상황에서 쉬운 우리말을 사용해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소통을 도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언택트, 코호트격리, 팬데믹 등 어려운 외국어 사용이 늘어난 가운데 감염병에 취약한 고령층이 관련 정보 습득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정부가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상황에서 쉬운 우리말을 사용해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소통을 도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언택트, 코호트격리, 팬데믹 등 어려운 외국어 사용이 늘어난 가운데 감염병에 취약한 고령층이 관련 정보 습득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60대 이모씨는 "(코로나19 초기) 언택트, 팬데믹, 드라이브스루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며 "굳이 왜 영어를 쓰는지 모르겠다. 알아듣기 쉬운 언어를 사용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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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언택트, 팬데믹 등 각종 외국어 사용이 많아졌다. 이로 인해 다른 연령층보다 외국어표현 이해도가 낮은 고령층이 감염병 관련 정보를 얻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서울 용산구 서울역에 마련된 임시선별검사소에서 한 시민이 코로나19 검사를 받는 모습. /사진=뉴스1 |
일각에서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 통일성 있고 편하다는 의견도 내놓는다.
하지만 서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정책 등) 정부나 언론의 메시지가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경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할 수 있다. 이는 소외 그 이상의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예컨대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별 조치 등 정책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방역에 사각지대가 생길 수도 있다.
서 교수는 "코로나19 초기에는 외국어 표현을 마땅히 대체할 우리말이 없었다는 변명이 가능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문체부가 도입한 외국어 남용 3일 대응 체계에 따라 외국어표현을 우리말로 대체할 수 있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기관이나 언론 등이) 지금 상황에서 외국어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공적인 의사소통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며 "(문체부 등의 우리말 사용) 권고에 귀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다.
권 회장도 같은 생각. 그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며 "각 중앙행정기관은 국어기본법에 따라 전문용어 표준화협의회를 두고 있다. 국립국어원과 협력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외국어 남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