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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가 만든 AI(인공지능) 이미지는 이를테면 인류를 말살하는 기계들의 반란이다. 제어되지 못한 AI가 무감각하게 인간을 비효율적이라고 계산해 언젠가 이 지구에서 배제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인간을 이롭게 하는 AI의 초기 제어가 필요하다. AI를 공부하느라 40대 중반까지도 미혼인 서울대 교수는 이런 배경에서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AI를 궁리했다. 요약하면 바로 뉴욕의 한국계 벤처기업 '딥매트릭스'(deepmetrics)의 설립 취지다.
딥메트릭스는 송현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43)가 안식년을 활용해 사업화하고 미국에 사실상 혈혈단신 건너와 세계시장에 직접 뛰어든 한국의 벤처기업이다. 스탠포드와 버클리에서 기계공학과 AI를 수학한 공학자의 실제 전공은 '조합최적화'다. 수학과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공학을 두루 써야 하는 효율화 방법론의 첨단이다. 이론은 복잡하지만 송 교수는 이를 인간에게 이롭게 쓰고 싶었다.
시작은 심플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로 같은 학교 병원의 박사들과 최적화 방법론을 고민하다가 응급의학의 영역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일단 태부족인 의사들의 일손을 덜어줄 문제가 시급했기 때문이다.
시중에는 영상으로 진단을 하는 AI 모델과 기업들이 하나 둘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AI 알고리즘의 수준을 당장 의사의 재량과 판단력, 노하우를 대체하는 레벨로 끌어올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른바 '손발을 땅에 대고' 겸손하게 실용 기술을 적용할 대상영역을 찾은 것이다.
현장의 의사들에게 답이 있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중환자실이었다. 시시각각 생(生)과 사(死)가 교차하는 그곳에서 의사들에게 가장 힘든 점은 루틴과 징크스를 구별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의사의 노하우가 충분하지 않아도 환자를 돌볼 수 있지만 후자는 경험이 많은 의사가 매시간 급변하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변화 재량을 발휘해야 하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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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쉬운 부분이 인공호흡기의 조절이었다. 중환자라고 해도 상태의 변화가 없는 이들에겐 자동조절을 적용해 보는 시도가 가능했다. 이런 상태의 환자에게 의사가 당장 위중한 환자들을 외면하고 오랜 시간을 붙어있는 것 자체가 최적화에 위배되는 비효율성이었다.
자발호흡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위중한 상태는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분야에선 AI가 그동안 축적된 사례를 적용해 의사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상태에 따라 단위당 호흡수와 흡.호기 비율 및 압력을 조절해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송 교수는 2020년 1분기부터 서울대 병원으로부터 고해상도 중환자실 데이터를 수집했다. 3675일 동안 188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중환자실 데이터 세트에 대한 검증을 완료한 것이 알고리즘을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프로그램화에 자신감을 갖게 된 송 교수는 서울대 의대 고영일 박사(혈액종양학과 부교수)의 도움을 받아 딥메트릭스를 창업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와 의대 출신 6명이 합심, 기업의 형태를 이뤘다. 이른바 '화이트박스 AI'라고 명명한 알고리즘 기반의 프로그램은 실제 놀랄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딥매트릭스는 프로그램 성과만으로 지난해 국내 벤처캐피털인 IMM인베스트먼트와 카카오벤처스로부터 15억원 가량의 초기투자를 받았다. 국립공공기관인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비슷한 금액을 연구비로 지원했다. 송 교수는 성공의 확신을 가지고 올 초 연구년을 맞아 이 데이터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딥매트릭스의 사업토대를 뉴욕으로 바꾼 것이다.
한국에서 검증한 데이터를 미국 병원에서 적용해 안정성을 입증할 경우 곧바로 세계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1년 간 뉴욕 맨해튼에 둥지를 튼 그는 AI 박사이자 서울대 교수이면서 전직 구글 연구원이란 커리어를 들고 미국 의료계의 문을 두드렸다.
옥석을 가리는 눈은 미국 전문가들이 더 예리했다. 당장 세계 최대 비영리 의료기관인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이 기술을 알아보고는 엑셀러레이트 프로그램으로 선정해 지원을 시작했다. 송 교수는 최근 FDA(미국 식품의약국) 검증 신청을 준비하면서 미국 특허 출원에 나선 상태다.
중환자실 데이터는 최근 312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6604일 동안 확장해 진행 중이다. 딥매트릭스는 올 10월부터 500만달러(약 65억원) 규모의 프리 시리즈A 투자유치를 미국에서 시작했는데 가능성을 눈여겨본 현지 투자자들의 문의가 상당하게 밀려들고 있다.
송 교수는 "의료비가 비싼 미국에서도 중환자실 사용이 불필요한 환자들의 입원 기간은 68만9021일(일 환산) 정도"라며 "이 시장에서 AI의 안전성을 검증해 의료진과 시너지를 내면 비용적으로는 연간 40억달러(약 5조원) 이상을 아낄 수 있고 무엇보다 더 많은 환자를 살리면서도 의료진의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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